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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학 조규현교수님

루터의 생애

조규현 조규현
작성일 2023-06-10 20:45
조회 397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생애의 사건과 의미



루터의 추종자들은 ‘겸손한 반항아들’이라 불리었고, 혹자는 루터를 ‘머리가 일곱 개나 되는 악마’라 불렀고, 그와 가장 가까운 동료는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라 주장하였다. “루터는 예나 지금이나 끊 없는 논쟁의 대상일 것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3.


루터의 삶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는 공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둘째는 우리들처럼 삶을 살았던 구체적 인간이다.
필자는 루터의 전 생애의 사건에서 어떤 의미를 추구해 보고자 한다. 그 의미란 신앙과 신학이 될 것이다.


Ⅰ. 루터의 시대

1. 르네상스 시대

마키야벨리, 미켈란젤로, 라파엘,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와 동시대에 살았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상이 유행하였고, 콜롬부스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지성적으로는 활기찬 시대였다.


2. 활기에 찬 시대 속의 어두운 실상

1) 흑사병, 매독으로 전 유럽을 괴롭혔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2) 대형교회와 수도원의 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면서 거대한 이익만을 챙겼다.
영주들은 한담이나 하고 있는 종들의 혀를 짜르고 행실이 못된 종은 다리를 짤랐다.

3) 무법천지라 할 정도로 폭력이 난무 하었다.


3. 종교 상황

1) 영적인 안정을 추구

- 그들의 종교는 행위의 종교였다. 그리고 순례의 시대였다. 자기들의 저질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수도원을 순례하였다.

- 성인(聖人)과 유물(遺物)을 숭배하였다. 성인들의 유물은 숭배하면 죄가 용서받는다고 가르쳤다. 성인들의 뼈나 머리털을 수집하면 선행으로 인정된다.


2) 죽음의 시대였고 ‘불과 유황’시대였다.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네 힘이 닿는대고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3) 죄, 고백, 고해성사

양심에 괴로움을 겪는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고, 더욱 분명한 죄의 용서를 원한다면 수도원의 순례와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Ⅱ. 루터의 일생


1483. 11.10. 루터의 출생
①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그로스 한스(Hans Luder)와 어머니 지글러(Margarethe Ziegler) 사이에서 태어났다.

② 아버지 한스(Hans Luder)는 농부였다.
농부는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았다.
아버지 한스(Hans Luder)는 능력과 재능의 소유자로서 부지런하고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③ 두 부부는 본래 살던 뫼라 지방에서 구리 광산촌인 아이스레벤으로 이사를 하였다.

1484년 초여름
아이스레벤에서 약 20 마일 떨어진 만스펠트로 이사를 하였다.

① 만스펠트에서 루터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이사 온지 7년 만에 아버지 한스는 그 지방에서 자립적으로 광산업을 경영하며 경제적으로 기반을 이루었고, 지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어 시 의회 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② 유년 시대의 가정교육

당시 가정교육 형편으로 보아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회초리 옆에 사과를 두라”는 격언데 따라 아주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루터가 어렸을 때 응석은 아예 허용하지 않았고, 루터는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아 도망까지 쳤으며, 어머니로부터도 작은 호도 하나를 훔쳤다고 피가 나도록 초달을 받은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지원용, ⌜개혁자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36.

주입식(注入式) 교육을 하던 그 때의 학교에서도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③ 루터의 가정은 성실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정이었으며 사회로부터 존경받은 가정이었다. 아버지 한스는 루터가 법관이 되길 기대하고 있었다.

1497년 부활절 경
만스펠트 초등학교를 마치고 막데부르크(Magdeburg) 학교에 입학

만스펠트 초등학교에서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학교 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충실한 신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라틴어 문법, 논리, 웅변학, 음악을 배워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 의식의 전부와 제도, 교리 등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1498
만스펠트에서 아이제나흐로 이사.
따라서 만스펠트에서 아이제나흐 학교로 전학

① 막데부르크 학교
초등학교 6년을 마치고 1497년 당시 평판이 높았던 막데부르크에 입학하였다. 막데부르크 지방에서 부(富)한 교회당들과 예배 처소가 있어 어디에서나 신부들을 만날 수 있었고, 경건하기로 유명한 ‘공동생활의 형제단’ 기관에서 일평생 잊을 수 없는 경건 교육을 받았고,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② 아이제나흐 고등학교

1498년 루터의 가정은 아이제나흐로 이사를 하였고, 루터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인 아이제나흐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이 학교에서 라틴어를 충분히 배웠고, 능숙한 표현력과 웅변술, 언어의 시적 표현 등에 있어 어느 동료들 보다 뛰어났다.

③ 아이제나흐 시절에 루터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교양이 있는 꼬타(Kunz Cotta)씨 가정을 알게 되어 이 가정의 모범적인 경건한 종교적 생활 모습을 배웠고, 이 가정에 드나드는 많은 경건하고 교양 있는 분들의 대화를 통하여 마음의 감화와 감동을 받았다. 후일에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간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지원용, ⌜개혁자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50.


④ 루터는 평범한 교회의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⑤ 3년 동안 공부하면서 루터에게 사상력을 일깨워 주었던 스승을 만난다. 교장 요한 트레보니우스였다. 그리고 비칸트 겔트눕푸라고 하는 승승과도 평생에 걸친 친교를 하였다. 고전과 역사 공부를 권고하였고 이들은 대학에 입학하여 더 많은 학문을 공부하도록 권하였다. 당시 시절에는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내었다.


1501. 5. 에르푸르트 대학 입학 허가 받음
① 1501년 루터의 나이 18세에 당시의 명문대학인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②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形而上學) 및 윤리학을 수학하였고 지리학도 배울 수 있었다.

③ 루터는 평범한 청년 대학생이었으나 총명하였고 유머가 있었다.


1502. 9. 29. 학사 학위 취득
1505. 1.7 문학 석사 학위 취득
1505. 5. 에르푸르트 법과대학 입학
① 아버지 한스의 요구대로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② 그러나 루터는 법학에 흥미를 잃고 다른 과목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1505. 7. 2. 뇌우와 서원
①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 대학까지는 걸어서 꽤 먼 거리였으나 걸서 돌아가는 길에 천둥번개가 그를 덮쳐 땅에 쓰러졌다. 이 때 “성 안나(Anne)시여, 저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나이다”하고 소리쳤다.

② 처음에는 아버지 한스가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축복해 주었다.
③ 천둥번개는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였음에 틀림없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49.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동료들과 작별을 하였다.


1507. 7. 17.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입회

① 심령적 갈등에 싸이게 된 루터는 마침내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파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② 엄격한 수도원의 규칙에 따라 하루 7번씩 기도를 드려야 했다. 새벽 1시나 2시경 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기상을 한다. 둘째 번 종소리에 맞추어 엄숙하게 교회 안에 들어가 성수(聖水)를 몸에 뿌리고 제단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려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쌍쌍이 고요하게 밖으로 나아가 각자의 분주한 일과를 시작하게 된다.

③ 판에 박힌 수도원 생활이 처음에는 위안도 되었고 마침내 신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


1507. 5. 2. 서품과 첫 미사

①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 잔은 나의 피의 언약이다” 이 말을 가지고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만들 수 있었다. 실로 24세의 청년 루터의 첫 미사의 집전 순간에 온 몸을 떨었다.

② 수도승으로 살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구원을 갈구하였으나 구원은 더욱 붙잡기 어려운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1508. 겨울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한 학기 도덕철학 강의

① 1508년 그는 슈타우피츠의 권유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 비텐베르크는 인구 3,000밖에 안되는 쓸쓸한 도시로서 학문적인 도시였다.

② 거기서 웅장한 건물이 넷 있었는데, 즉 대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과 제성도교회(諸聖徒敎會)와 작센 선거후(選擧候)인 영주 프리드리히 현인(Frederick the Wise) 궁전이다. 슈타우피츠(Dr. Staupitz)는 프레데릭의 고문이었다.


1509. 3. 성서학사와 Sententiarius가 됨


1510. 11.
엄률 어거스틴 수도회의 대표로 로마로 파견됨

① 각 수도원 사이의 알력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대표자 회의를 가졌는데, 어거스틴 수도원 대표로 루터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슈타우피츠의 심부름으로 1510년 가을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당시 교황청이 있는 로마와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는 일반인 모두의 소원이었으므로, 27세의 젊은 철학 교수이자 신학도인 그가 로마를 방문한다는 것은 흔히 생기는 기회는 아니었다. 기대에 부풀어, 로마에 들어서는 포풀로 문에 이르러 루터는 땅에 엎드렸다. 그리고 “오, 신성한 로마여!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받은 넌 얼마나 아름다우냐!”라고 감격하여 소리쳤다.

② 로마는 루터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로마는 성인들의 공로(Treasury, 보고(寶庫))가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저 있다.


③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의 궁정까지 걸어 올라가신 ‘거룩한 계단’이 있었다. 또 거기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뼈가 묻혀 있었다.

④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로마는 루터에 오히려 실망을 안겨다주었다 로마의 사회는 부정과 음란과 사치의 구렁텅이였으며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성당 안은 신자들이 별로 모이지 않아 몹시 쓸쓸했다. 사제가 올리는 기도 소리도 힘이 없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참회 장소에는 참회자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불결한 모습, 게다가 수도사들의 무식과 무질서는 이 순례자를 더한층 놀라게 할 뿐이었다.

머무는 동안 루터는 종교적인 고적(古跡)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카타콤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옛 신자들이 로마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그 컴컴한 굴 속에 숨어살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올린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원형경기장에 끌려가 짐승의 밥이 되거나 화형당했던 것이다.



1511. 4. 로마에서 돌아와 비텐베르크로 망명

①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Dr. Staupitz)는 수도회 독일 관구장(주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승들은 슈타우피츠의 명령에 불복하였으나 루터는 순종하였다. 이 일로 인해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참다 못해 비텐베르크로 망명하게 되었다.
슈타우피츠에 대하여 루터는 “슈타우피츠 박사 덕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옥으로 빠져버렸을 것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91.
라고 술회하였다.

루터는 도덕적으로 진지하고, 종교적으로 예민하며, 비상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간파한 슈타우피츠는 영적 고문을 당하고 있는 루터에게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 추천하였다. 영적인 문제를 종교의 원전(原典)으로 돌아가 그것과 씨름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p.73-74.


② 선거후(選擧候)인 프리드리히 현인(Frederick the Wise)은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을 무척 애지중지하였던 사람으로서 루터를 교수로 초빙하였다.

③ 루터는 학문의 여왕인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다.
- 이 당시의 신학은 스콜라 신학이다. 스콜라 신학의 특징은 인간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④ 루터의 신앙의 스승들은 한결 같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타울러 - ‘독일 신학’의 저자. 교회와 개개 구성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방법은 거룩해지는 것이라 하였고 신비주의를 강조하였다.

* 에라스무스 - 도덕적 실천을 강조함.

⇨ 후일에 복음을 알고 난 후 타울러와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⑤ 그러나 루터에게는 영적인 참 평화가 없었다.

* 고해성사의 주 내용 - 7가지 큰 죄(교만, 탐심, 욕심과 욕정, 화, 과식, 시기, 게으름)


<루터의 회의>

(1) 하나님은 절대적이어서 인간의 정의(正義) 관념으로는 도저히 제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2) 인간의 운명은 그 성격까지를 포함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루터에게 이것은 하나님은 변덕스럽고 인간의 운명은 점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 되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72.



<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뒤를 따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공로와 관계없이 어떤 사람은 귀한 그릇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천한 그릇으로 쓰려고 선택되었다고 하였다. 버림받은 자들은 제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소용이 없으며, 구원받은 자들은 제아무리 무슨 짓을 하여도 구원받은 자들이다.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위로가 되지만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소름끼치는 고문이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72.



1512. 10.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① 빛을 찾은 때(1513-1517)
루터의 생애 가운데 비교적 조용한 때가 1513년에서 1517년 사이 5년간이라 볼 수 있다. 성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시기로서 가장 귀중한 정신적이고 신학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② <성서강해>
시편강해 : 1513-1515, 1518-1521, 1532-1535
로마서강해: 1515-1516
갈라디아서강해: 1516-1517, 1531.
창세기강해:1518, 1535-1545
이사야강해: 1528-1530
소예언서들 강해: 1524-1526
요한복음강해: 1527
디도데 전서 강해:1529
디도서와 빌레몬서 강해: 1527
히브리서 강해: 1517-1518


1513. 가을
(시편) 강의 시작

①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을 전통적인 해석과 다르게 하였다. 즉 “그 의에 의해서 하나님은 신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96.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 적용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삶의 행위는 곧 그 분에 대한 신앙이다. 중세 말기의 신학과 종교적 실천들의 핵심적 보류를 것이다.

이 의를 루터는 ‘수동적 의’라 불렀다.

② 겸손해 지려는 것은 거짓이며 죄이다. 겸손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여야 한다. 신학자는 인간의 자기 의를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을 오히려 죽음으로 내 쫒고 있다.



1515. 봄 (로마서) 강의 시작
① 율법은 거울이다.
②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③ 오직 복음만으로
④ 죄인이면서 의인
⑤ 거룩함에 대한 추구의 위험성


1516. 가을 (갈라디아서) 강의 시작


1517. 가을 (히브리서) 강의 시작


1517. 10. 31. (95개조 논제) 붙임


1. 개혁 운동의 발단

1) 외적 요인 - 면죄부 판매

특별히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와 관련해서는, 사죄(赦罪) 또는 ‘연옥의 형벌’에 대한 면죄 중 하나를 또는 이 양자 모두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죄악 된 행위 때문에 영원히 받아야 형벌을, 교회에 적절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면하거나 감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면죄부는 교황의 수입 원천이었다. 베드로 대성전을 완공하여야 할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1517년 9월 막대불그의 알브레히트(Albrecht von Mainz) 대감독은 테첼(Johannes Tetzel)을 시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모금을 위해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연옥이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이 되지 못한 성도가 연옥에 들어가 속죄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곳이다. 지상(地上)의 성도(聖徒)가 연옥의 부모형제 및 친지를 위하여 미사, 성례, 기도, 선행 등의 공덕을 쌓으면 이로 인해 연옥에서 받을 고통이 경감되거나 속죄에 보조가 된다는 것이다.
테젤(Tetzel)에 의해 열심히 판매되고 있던 면죄부에 대하여 입장을 밝혔다.
루터는 “면죄부를 인하여 영혼이 연옥에서 해방된다는 교리는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 95개조의 논제 조규현, ⌜루터의 95개조 논조⌟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면죄부 효력에 대하여 토론을 목적으로 95개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게시판에 부쳤다. 그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3 가지 요점으로 루터는 설명을 하고 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p.100-105.


그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3 가지 요점으로 루터는 설명을 하고 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p.100-105.


① 모금 목적에 대한 이의(異議), ② 연옥에 대한 교황권의 부정 ③ 죄인의 행복에 대한 고려(考慮)이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79.



2) 내적 요인 -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롬 1:17)

루터가 공격한 것은 단순히 면죄부 판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33.
이러한 관습 배후에 있는 사죄에 대한 잘못된 신학을 공격하였다. 사죄(赦罪)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문제이지 다른 어떤 사람이나 제도가 개입되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성서의 내용을 읽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터는 1516년 설교를 통해서 세 번 이 면죄를 비판하였다. 자기 교구의 재정을 마련하는 세원을 방해하는 행위였지만 영적인 함정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92.


(1) 칭의(稱義)에 대한 루터의 초기 견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는데 인간의 최소한의 전제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올바르게 말하고 있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19.


칭의론에 대한 루터의 초기 사상은 하나님께 인간이 부르짖음으로 해서 칭의에 있어서 죄인이 선행권을 갖는다고 보았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긴다는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하나님 의’에 대한 루터의 관점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20.



(2)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루터의 발견

구원받기 위한 인간의 능력이 내부에서 갖고 있지 못하며 저주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루터는 로마서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1:17)”구절을 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흥분해 하였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의미가 ‘의인(義人)은 하나님의 선물(믿음)로 말미암아 사는 그러한 의(義)’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를 지시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루터는 인간의 공로(功勞)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스콜라주의 신학이 결국은 인간의 욕구 사상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김영한 , ⌜헌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1990. p.299.
루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영광의 사상이 종교개혁 사상이 되었으며 칼빈에 있어서 강하게 표현되었고, 이 사상은 칼빈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김영한 , ⌜헌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1990. pp.298-299.


‘하나님의 의(義)’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의(義)임을 깨달았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24.

그리고 참회는 은총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26.


2. 교황의 반응

루터는 마인츠의 알브레히트(Albrecht) 대주교에게 면죄부의 부당성을 글로 써 보냈다. 알브레히트는 교황에게 그것을 보냈다. 교황의 답변은 “루터는 술취한 독일인이다. 술이 깨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탁발 수도사 마르틴은 훌륭한 녀석이다. 이 모든 법석은 수사들의 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08.

교황은 자기의 생각을 바꾸기는커녕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원장을 새로 임명하여 마르틴 루터 수사의 불을 꺼서 그 연기가 대화재로 번지는 일이 없게 하였다.



1518. 4. 26. 하이델베르크의 논쟁(Heidelberg Disputation)

사죄(赦罪), 하나님의 은총, 자유의지, 신앙 등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였다.

3년마다 열리는 수도회 분회의 회의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열렸다. 루터는 수도회의 창시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인간 타락에 대해서 변호하기로 되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루터를 욕하는 격렬한 글들이 회의에 제출되기도 하였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소요도 있었다.

① 요한 엑크와의 논쟁

엑크의 주장
- 루터는 선한 교회의 질서를 문란 시킨다.
- 선행의 용기를 말살시킨다.
- 일반인들로 하여금 혁명을 유발시킨다.

⇨ 루터에 대한 악화된 감정 때문에 루터는 다른 곳으로 여행을 하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루터의 주장

- 고해성사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설교를 통하여, 교황은 연옥으로부터 풀어주는 권세뿐 아니라 거기에 할당하는 자격을 가질 수 없으며, 파문하거나 금제(禁制)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12.


- “생활의 가장 유익한 교리인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의의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렇게 하는 데 방해한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5.


- 율법과 선행에 관하여
“정죄의 심판이 모든 행동에 있어서 두렵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교만을 피할 수 없거나 혹은 참 소망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5.
인간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 자유의지는 타락 이후 그 명칭일 뿐이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한 그것은 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5.


-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죄에 죄를 더함으로써 이중으로 죄를 범죄하게 된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6.


-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기 전에 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전적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명하나, 그것이 이루어진 일은 결코 없다. 은총은 ‘이것을 믿으라’ 말하나,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6.


- 영광의 신학은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은 사물을 사실 그대로 부른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6.


- 루터는 자기를 가르쳐 준 한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확신합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정전법이나 교황의 교서, 스콜라 신학, 철학 그리고 논리 등이 모두 사라지고 다른 학문이 등장하지 않는 한 교회를 개혁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26.


-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칭의와 십자가의 신학은 함께 있다. 타락 이후에는 자유의지란 아예 없다. 인간은 단지 악에 대한 자유만 있다(facere quod in se est).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에서 비로소(resignatio ad infernum)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사색적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권세와 세상의 지혜에 비해 연약함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다.



1518. 7. ‘95개조 논조’에 대한 실베스터 프리리아스의 ‘대화록’

- ‘대화록’이 6월에 출간됨
- 로마 교황이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월한 신학적 경력을 갖고 있는 노학자 실베스터 프리리아스에게 루터의 95개조 논제에 대한 심사를 의뢰하였다.
프리리아스는 ① 교황의 무오류를 주장함과 ② 면죄부 반대는 성령의 뜻을 거슬렸다고 보고하였다.

- “교황이 교황의 자격으로 결정할 때는 오류가 없다. 그의 교리는 무오(無誤)한 신앙의 통치이며, 성서의 힘과 권위도 거기서 나온다”

*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인 루터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다.


1518. 8. ‘95개조 논제 해설’ 발표

고해 성사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던 라틴어역 성구가 오역(誤譯)이라는 사실을 루터는 발견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11.

마태복음 4:17이 라틴어 번역에서는 “고해하라(do penance)”로 되어 있지만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에서는 단순히 “뉘우쳐라(be penitent)”고 되어 있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네 마음을 바꾸어라”였다. “이 문맥에 힘입어” 루터는 슈타우피츠에게 확답을 바치는 글에서 적고 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희랍어의 마음의 변화보다 라틴어의 행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은 틀렸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결정적인을 실례(實例)를 통해, 교회의 한 가지 성례(聖禮)가 성경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12.


- 사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는 선포할 수는 있지만 사죄할 수 있는 권위는 없다.

- 그리스도는 (열쇠의 능력에 의해서) 사람들의 구원을 어떤 개인의 손에 일임하지 않으셨다. 오직 그리스도의 약속의 진리를 믿는 것만이 중요하다.

- 교회가 공로의 보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 면죄부, 순례, 죽은 자를 위한 특별미사, 사원, 성사, 유물, 특수한 영적 실천, 그 밖의 종교적 실천 등을 배격하였다.

⇨ 이 해설서를 교황에게 보냈다.

⇨ 만스펠트의 알브레히트 백작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즉 몇몇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서 교수형 시키거나 물에 빠트려 죽이기고 결정하였다는 사실이다.


⇨ 그러나 루터는 “그들이 나를 위협하면 할수록 나의 신념은 더욱 강해져만 간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32.
고 하였다.



1518. 8. 7. 로마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로마 소환장이 도착함.

8월 7일 프리리아스의 ‘대화록’과 동시에 로마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로마 소환장이 도착함.


1518. 8. 카예탄 추기경과의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 회의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예탄(Cajetan, 1469-1534)으로부터 심문 받음.

- 이곳에는 영주들, 주교들, 도시의 대표자들, 그리고 황제 자신도 모여 있었다. 물론 선제후 프리드리히도 있었다.

- 이곳에서 결정은 결국 로마행은 무마되고 대신 교황청 특사 카예탄 추기경과의 아우구스부르크 회의를 갖게 됨.

- 카예탄 추기경은 교황청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루터를 체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자랑하는 신학자 루터를 이들에게 내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치적인 흥정에 의하여 루터를 아우구스브르크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1518. 8. 31.
프리리아스(Prierias)에 대한 루터의 답변


① 교황은 비협조적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게 등을 돌리고 도미니크 수도회에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으로서 거룩한 궁정 장관이던 실베스터 프리리아스(Prierias)에게 루터에게 보낼 답장의 작성 임무가 주어졌다.

② 프리리아스는 다음의 내용을 루터에게 보냈다.
보편교회란 실제로 로마의 교회이며 추기경들이 대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교황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에는 오류가 없음으로 이에 불복하는 것은 이단이다. ‘그리스도의 권위가 교황에게 있다’

③ 루터의 답변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일반적인 공의회에만 현존한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36.

⇨ 성서의 기준으로 판단해 보건대 원칙적인 측면에서 교황도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따름이다.


1518. 10.12-14. 아우구스브르크(Augusburg)에서 카예탄(Cajetan) 추기경과의 대담

- 로마교황의 사절인 카예탄(Cajetan)은 프리리아스(Prierias)보다 실력 면에서 한 수 위였다.

- 카예탄은 루터에게 3가지 오류를 지적하였다.
① 공로의 가치
② 의인과 성사적 은총을 위한 신앙의 필요성
③ 교황의 권위

그리고 다음과 같이 루터에게 제안 하였다.

첫째 그대의 오류를 뉘우치고 그 주장을 철회할 것
둘째 그것들을 다시는 가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것
셋째 교회의 평화를 훼방하는 일체의 언행을 삼갈 것.

루터의 답변
- 교황의 권위보다 공의회와 성서의 권위가 더 있다.
- 성사(聖事)에 앞서 믿음이 필요하다.
- 면죄부에 관한 교황의 칙령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 모든 사람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 카예탄의 제안을 거절한 루터는 파문에 가까운 오명을 가지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겨우 비텐베르그로 돌아 왔다.



1518년 12. 18.

- 카예탄으로부터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인(Frederick the Wise)에게 편지가 전달됨.(루터를 로마로 호송하여 소추할 것이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이단됨을 확신하기까지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지 않았고 루터를 자기의 영토에서 추방할 생각도 없었다.

- 루터와 총장은 비텐베르그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계된 모든 과목의 강의를 중단시켰다. 카예탄과 도미니크 수도회는 아퀴나스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물들지 않는 수순한 철학과 신학, 과학의 물을 마실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1519. 1.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인(Frederick the Wise)에게 칼 폰 밀팃쯔(Carl von Miltitz) 파견

① 칼 폰 밀팃쯔(Carl von Miltitz)는 로마 출신의 젊은 청년으로 로마 교황청에서 일하는 야심이 많은 자이다.

② 로마 교황청의 제안을 프리드리히에게 전달하였다.
루터를 추방하든지 아니면 체포하여 로마로 압송해 주면 선제후에게 불이익 대신에 충분한 혜택을 주겠다.

③ 프리드리히에게 보낸 루터의 편지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들은 무슨 옳은 일을 하였는지가 밝혀만 진다면 저는 기꺼이 제 잘못을 뉘우칠 것입니다”


1519. 7.4-14. 라이프찌히 논쟁(Leipzig Debate)

로마 카톨릭의 거장(巨匠) 엑(John Eck)과의 논쟁이 벌어졌다.

- 잉글슈타트 대학 교수인 요한 엑크와 논쟁

-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65명의 무장 군인이 파견됨.
- 비텐베르크에서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of Bretten)을 비롯한 교수들과 학생 200여명이 응원차 라이프찌히에 도착함. 라이프찌히 학생들과 물리적인 충동이 한 차례 있었다.


⇨ 엑(Eck)의 주장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에 근거한다. 교황과 교회회의는 무오하다. 만일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면 화형에 처한다.


⇨ 루터의 주장
교황과 교회 회의의 무오성에 대한 엑의 주장에 정면으로 이를 부인하였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머리가 되신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는 자는 적그리스도다.

“하나님의 말씀인 거룩한 성서를 가진 한 평신도가 성서 없이 강하다고 하는 교황보다 더욱 위대하고 강하고 좋은 것이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07.
라고 루터가 말하였다.

⇨ 엑크는 흥분하여 루터에게 ‘“이단자! 루터 박사! 이단자!”라고 하였다. 이단 중에 대 이단’이라고 맹비난 하였다.

⇨ 루터는 “교부들은 나도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성서의 권위를 일층 더 내 세운다”라고 하였다.
정치적인 수완에는 엑이 앞섰으나 성서의 지식과 열정에 있어서는 루터가 앞섰다.



1520. 6. 15. 교황의 칙서

1)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다.

1520년 6월 15일자로 발부된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루터가 로마로 출두하여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을 확정한다)가 10월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교서를 받은 날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 10일 이후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면 곧 마르틴 루터는 파문이 된다.

교서를 받은 루터는 더욱 확신에 차서, “면죄란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착취하는 수단이다 이라는 말을 취소하고, 면죄란 가장 악랄한 주교들의 가장 되먹지 못한 협잡과 사기요 이것으로 그들은 신자들의 영혼을 속이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216.
고 하였다.

1520년 12월 10일 1천 여명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에 속한 헌법과 스콜라 신학의 무신론적 서적을 불태웠다. 그리고 교황의 교서를 불에 던지면서 “너, 주의 거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여! 영원한 불이 너를 소멸시키라”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98.


“그대들은 진심으로 교황의 지배에서 떠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악한 세대를 향해 내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완수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 양심에 짐을 지우는 것보다 차라리 모든 위험을 참고 견디려 하오!”


-루터에게 파문에 앞서 60일간의 유예 기간을 줌

- 프리드리히 현인(Frederick the Wise)으로부터 로마에서 온 편지 사본을 보았다. 선제후는 루터로부터 손을 떼라는 내용이었다.

⇨ 루터의 답변 “로마인들은 오직 이성과 성서에 기초해서만 우리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력이나 파문선고를 가지고서라면 그들은 독일을 또 하나의 보헤미아로 만들게 될 뿐입니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76.


⇨ 루터는 ‘로마의 교황권에 대하여’라는 책을 발간한다.
두 개의 교회가 있다.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이다. 가시적 교회는 위계질서가 있고 머리에는 교황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만이 머리가 되시는 영적이고 내적인 교회이다.

⇨ 16세기에는 이단들의 책을 불태워 버렸다. 루터는 12월에 로마교황청의 책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는 “만일 그들이 내 책을 불태워 버린다면 나는 모든 정전법(canon law)을 태워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1520. 8-11. Luther의 3대 논문


루터의 3대 논문

라이프찌히 변론(Leipzig Debate, 1519) 이후 루터는 다시 비텐베르크에 돌아와 연구와 저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1520년 6개월 동안 그의 유명한 3 가지 개혁 논문을 쓰고 새로운 복음주의 신학을 명시해 주었다. 지원용, ⌜루터선집(5)⌟, 컨콜디아사, 1999. p.297.


루터의 3대 논문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기념탑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증거 해주는 개혁의 종소리이고, 신자들의 빛나는 보배라 할 수 있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11.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 3가지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첫째 교황의 권력 남용에 대하여 대항할 권리가 크리스챤에게 있다.
둘째 교황의 영적 속박으로부터 해방하여야 한다.
셋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된다.

각 논문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

- 초판 4,000부가 불과 2주만에 절품되었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는 아무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로마에는 무너뜨려야 할 교황의 큰 성벽이 3개 있다.

첫째 교황의 절대권위의 무오성
둘째 교황의 성서해석권
셋째 교황의 교회 회의의 소집권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만인 제사장설’로 맞섰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 믿음, 성령 그리고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2. 교회의 바벨론 감금

1520년 10월에 나온 이 논문은 루터의 저작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며 신학적인 논문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13.
그 중 가장 과격하게 보였던 것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The Babylonian Captivity)’이다.

이것은 교회가 여러 가지 성례를 포로로 사로잡고 있던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제목이다. “교황청은 바벨론 왕국이나 적 그리스도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181.
라고 하였다. 루터는 일격에 7가지 성례의 숫자를 성찬과 세례 둘로 줄여 버렸다.

1) 성찬과 세례만 성례전으로 취급함

세례와 성찬과 참회만을 성례전으로 치고 다른 예전은 성례전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로마교회는 성찬에 대하여 3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다.
첫째 평신도에게는 떡만 주고 술을 주지 않는 것이며
둘째 화체설(化體說)이며
셋째는 성례전을 희생(Sacrifice)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2) 안수는 의식일 뿐이다.

신품(神品, 또는 안수,按手) 성사를 하나의 성례로 보지 않고 반박함으로써 그는 성직자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만인제사장설에 대한 기초를 마련했다. 루터가 보기에 안수(按手)란 사역자를 교회가 세워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78.


3) 미사는 희생제사가 아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루터가 미사를 성찬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미사는 성육신과 십자가 처형에 대한 하나의 반복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카톨릭 제도에서는 그것이 핵심이었다.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거룩한 변화를 일으킬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성육신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제단 위에서 돌아가신다. 이 기적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신품을 통해서 대행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제들뿐이다. 이 은혜의 수단은 오로지 그들의 손으로 집행되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자리를 차지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리자로서 사회 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자리를 차지한다.

미사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사제의 의식을 통해서 그 자체 안에 있는 한 힘 덕분에 효력을 발휘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곳에서 기뻐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요 그것은 성례가 없이도 효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80.


미사에 대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266.

미사는 하나의 희생제사(a sacrifice)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림이요(a thankgiving), 신자들끼리의 사귐(communion, 성찬의 의미도 있음)이다. 미사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뜻에서의 제사가 아닌 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노여움을 풀 필요가 없기 때문이요, 그것이 무엇을 제물로 바치는 뜻에서의 봉헌(oblation)이 아닌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칠 수 없고 오로지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사에서 사용되는 ‘거룩한 제사’, ‘봉헌’, 그리고 ‘봉헌 제물들’이라는 표현들은 하나의 상징적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법은 복음에게 굴복해야 한다.



3. 크리스천의 자유

1) 율법으로부터 자유인인 동시에 이웃을 위해 사는 자유인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의 하나인 '크리스챤의 자유'에서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主)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從)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A Christian is perfectly free lord of all, subject to none. A Christian is perfectly dutiful servant of all, subject to all."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31, 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71. p.344.
라고 하였고, 또 "크리스챤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와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31, 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71. p.371.
라고 하였다.


2) 선행은 믿음의 조건이 아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언급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행함이 상호 협력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절한 훈련으로 그의 몸을 잘 단련하고 몸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공적을 행함으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크리스챤은 믿음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그를 사랑하고 찬미하는 데 동참할 따름이다. 지원용,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3대 논문⌟, 컨콜디아사, 1997. pp.318-319.



1520. 12.10. 추방압력 교서"Exsurge domine"
(주여 일어나소서)가 오다

- 루터와 그의 친구들은 비텐베르크의 엘스터토어(Elstertor)에서 교회법전들과 스콜라 신학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파문압력 교서의 사본도 불에 던졌다.


1521. 1,3.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장 전달

파문장(破門狀) 전달

파문은 사형 선고이다. 마침 1521년 1월 3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되는 파문장이 전달되었다.

루터가 신앙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던 스승 스타우피츠(Saupitz)로부터 실망감과 비애를 느꼈다. 루터를 도와 진리를 사수하지 않고 수도원장직을 물러서는 스승의 모습에서 실망하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는 위험한 일을 시작하여 하나님에게 인도를 받는 높은 정신으로 일을 진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이 이상 더 나아갈 수 없다. 연한 밀크가 필요하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00.
라고 말하면서 수도 원장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루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아직 변함이 없고 여자의 사랑보다 더하여 언제나 깨어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돼지나 먹는 껍질에서 생명의 초장과 구원의 말씀으로 다시 인도함을 받은 데 대하여 당신에게 혜택을 입음 바 많습니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00.



1521. 4.16- 18.
보름스(Worms) 국회 시작

“나는 오직 성경의 증언에 의해서만, 또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만 설득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도 역시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종종 잘못을 저질렀고 그들 스스로가 모순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내가 여기 섰나이다(Here I stand, help me, Lord!). 아멘” vol.32.pp112-113.


1521년 칼(Karl) 제5세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독일 황제가 된 이후 첫 의회가 보름스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루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의회를 통하여 묻고자 하였다.

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황제, 자문관과 로마의 대표자들, 군인들, 7명의 독일 선제후와 주교, 교회의 영주, 영토 영주, 대도시의 대표자들었다.

<엑과 다른 법무관>의 질문

첫째 (수 많은 루터의 책들을 향해) 이 책들이 그대가 쓴 책인가?
둘째 이 책의 내용을 취소하는가 혹은 지지하는가?

<엑의 보충 발언>

“그대는 신성한 전통 신앙에 대하여 이단을 부르짖을 권리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되고 사도들에 의하여 온 세계에 선언되고 순교자들의 피로 봉인되고 거룩한 교회 의회에서 확인하여 교회에서 확정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끝까지 믿고 유산으로 우리들에게 전한 것이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35.
라고 하였다.

<루터의 답변>

그 책들은 나의 것이다. 그 내용은 취소할 수 없다. 성서와 명백한 이성(理性)에 의해서 잘못을 느끼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교회 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황제 칼 5세의 선언>

“일 천년 간의 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한 한 수도사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아무도 그를 숨겨 주어서는 안 된다. 그의 추종자들도 그와 같은 정죄의 운명을 받게 될 것이다. 루터의 책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뿌리까지 뽑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하면서 교황파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1521. 5월초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1521-1522)

① 루터에게 파문이 내려졌고,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도움을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② 여기서 루터는 갖가지 심신의 괴로움 때문에 변비와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③ 이를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성경 신약을 독일어로 3개월 만에 번역하였다. Heinrich Bornkamm⌜루터와 구약성경⌟, 엄현섭 옮김, 컨콜디아사, 2006. p.30.



1521.
6. 1.

⌜고백에 관하여:교황은 고백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 1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사순절에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도록 되어 있었다.
- 루터는 사제에게 고백하는 것은 사람들의 양심을 짓누르는 악마적인 짐이라고 선언하였다. 다만 성도들 서로서로에게 고백하고 상담하고, 위로하고 도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00.


1521. 6.20. 라토무스를 반박함

- ‘의인론’에 대한 논박이었다. 루터의 주장은 인간은 전체적으로 정죄받았기 때문에 여하한 종류의 행위를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1521. 11월 사적 미사를 폐함:수도원 서약에 대하여

① 루터의 주장들에 대한 반응들이 주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동료 한 사람이 종단을 떠나 결혼을 하였고, 13명이 수도원을 떠났다.

② ⌜미사의 오용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③ 교수들은 회의를 열어 토론에 부친 결과 미사가 제사로 간주된다면 우상이라고 선포하였다.

④ 루터가 속한 종단의 사제들은 미사를 폐지하였다.

⑤ 그러나 루터는 옛 방식의 미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반대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독신서약 역시 그렇게 하였다.

⑥ 수도원의 서약에 관하여서는 강제가 아니라 자율에 맡겨라고 하였다.



1521. 12.3-4. 비텐베르크(Wittenberg) 방문

- 루터는 몰래 밤에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여 돌아가는 세상 민심을 살펴보았다. 루터를 세상을 선동하는 자라고 악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521. 12.15. ⌜선동에 대해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모든 진실한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권고⌟

- 루터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선동적인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여하한 대중적인 소요는 모두 ‘사탄이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표’라고 선포하였다.



1521. 12. 신약성서 번역

① 약 11주 만에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② 신약성서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통해서 명령이나 율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09.

③ 루터는 독자들에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모세로 만들지 않도록, 그리고 복음을 율법책이나 교리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10.)고 권고한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거룩해지거나 구속받기 위하여 아무런 행위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복음은 그러한 행위를 저주한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죄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극복하셨기 때문이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10.


④ 루터가 성서 가운데 최선의 것이라고 선별한 것은, ‘요한 복음’, ‘바울서신’, ‘베드로 전서’라 하였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더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1522. 3.6.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돌아 옴

- 1521년과 1522년 사이에 많은 혁신이 일어났다.

① 보름스 의회 이후로 루터의 사상을 지지 하는 무리들 중에 열심당과 과격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뮌첼과 그의 그룹들은 종교 개혁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빨리 건설하기 위해서 힘과 사회적 혁명을 주도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의무라고 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 생각하여 금욕생활을 통하여 완전무결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② 비텐베르크(Wittenberg) 시(市)의 교수이자 성교회의 부사제인 칼슈타트(Carlstadt), 수도사 쯔빙링(Zwilling) 같은 과격주의자들은 성찬(聖餐)과 교회 내외의 성상(聖像)을 파괴하고 신부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청년들과 읍민들이 교회를 습격하여 신부들을 몰아내고 미사경본을 내동댕이치고 기물을 파손하면서 폭력에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③ 신부들, 수도사들, 수녀들이 결혼을 하였다.

④ 탁발수도사가 머리를 길렀고, 미사에 쓰는 포도주를 평신도에게도 허용되었고 평신도들로 성체를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⑤ 신부들은 일반 옷차림 그대로 성례를 집행하였고 미사의 부분 부분이 독일어로 낭송되었다.

⑥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가 중단되었고, 철야기도가 중단되고, 저녁 기도도 바뀌었으며, 여러 가지 상(像)들은 박살났다.

⇨ 그러나 루터에게는, 처음에는 이 변화에 갈채를 보냈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런 자유가 복장, 식사, 머리의 길이 문제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것에 대해 괴로움이 되었다.(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p.261-262.)

루터는 수도사의 서약에 대해 “문제는 서약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서약을 요구 하시는가 요구하지 않으시는 가이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265.)라고 하였다.

루터는 수도 서약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사랑(charity)과 자유와 모순 된다고 하였고,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덕목을 갖추라는 권고를 지키도록 특별한 하늘의 ‘부르심(소명:召命)’을 받았다는 거짓된 가정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각자에게 평범한 일을 통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특별한 종교적 소명은 따로 없다고 선언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265.)


⑦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나 결혼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다른 직업을 가졌다.

⑧ 루터가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에는 다소 무질서 하게 여러 가지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지어는 과격한 행동들도 있었다. 제단을 교회 밖으로 들어낸다든지 성상과 성유를 불태워 버리는 일들도 있었다.

⑨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나타나 이러한 상황을 전해들은 루터는 1522년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부르크 성으로부터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설교를 하였다.

⑩ 크리스챤은 어떤 조건이나 동기에서든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였다. 루터는 “나는 면죄부와 교황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힘으로나 완력으로 한 일은 없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기술한 것 뿐이었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65.)
라고 하였다.

<루터의 입장> 지원용, ⌜말틴 루터⌟,(대한기독교서회, 1977. p.157.)


(1) 구약 성서는 크리스챤의 생활 원칙이나 생활 방식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율법과 교훈은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의 사업으로 완성되었다.

(2) 그러므로 언약 시대에는 신약 성경이 크리스챤의 행동의 지침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초기 신약 시대의 관습이나 혹은 풍속들을 우주적인 성질을 가지고 어디서나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근본 중심은 영적 교훈이며 이 진리를 적용하는 중요한 대상은 신자의 마음이다.

(3) 모든 외적은 것은 이 영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만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의식이나 성상(聖像), 성서 및 교회의 유물 등이 복음의 메시지에 반대하여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 그것을 배격할 아무 근거가 없다.

(4)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크리스챤의 이상적인 생의 표본을 가르쳐 주는 것이며 참으로 거듭난 자의 영의 예증(例證)이다. 신앙과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가 결단할 자기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 루터는 여러 지방의 설교 요청이 있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교를 열심히 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확산되고 있었다.

- 루터의 학파(비텐베르크 신학)가 형성되고 있었다. 연장자인 카를슈타트, 연하자인 멜랑히톤, 요하네스 부겐하겐이다.

- 카를슈타트는 나중에 루터와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카를슈타트는 루터의 생각보다 더 혁명적이었다. 성직자의 복장을 버리고 평범한 농부들의 회색 옷을 입고 예배를 집례하였다.

- 카를슈타트(Carlstadt)를 진짜 혁명적인 사나이로 보듯이 토마스 뮌쩌 역시 카를슈타트에 버금가는 인물로 인정되었다. 뮌쩌는 루터를 추종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중들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농민전쟁(1524-1525)의 지도자였다. 나중에 처형되었다.



1523.3월 ⌜당대의 권위에 대하여: 어디까지 우리들은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가?⌟

- 루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두 왕국을 만드셨다. 하나는 영적인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나라이다. 전자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후자는 칼로 다스린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권세에 복종할 의무를 지닌다.


1524. 2월 ⌜독일의 시의회의원들에게⌟

- 공공의 아동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524. 8월 주의 만찬에 대해 카를슈타트(Carlstadt)와의 논쟁

루터와 카를슈타트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의 문제로 논쟁을 버린다.



1524. 9월 에라스무스가 ⌜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루터를 공격함

①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에게 있어서 참된 종교는 농부와 이발사가 일하면서 시편을 노래할 때 존재하였고, 루터에게는 시편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철저한 새로운 교리를 발견할 때 이었다.

② 에라스무스는 교육을 통한 경건을 증진하고 있었던 반면 루터는 종교개혁에 이르는 교리적 발전의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③ 에라스무스는 선과 악을 인간의 의지로 선택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1524. 11월
⌜슈트라우스브르크의 열광주의자들을 반박하면서⌟

① 이것은 나의 몸이다(마26:26)’에 대하여, 루터는 ‘이다(is)’를 뜻하는 반면, 카르슈타트는 ‘의미한다(signifies)’를 뜻했다.

루터는 여기에 대하여
“저에게 있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텍스트는 매우 뚜렸합니다. 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탄의 도구입니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40.)라고 혹평하였다.



1525. 1월 ⌜하늘의 예언자들에 반대하여⌟

① 우상파괴주의와 신속하고도 강제적인 예배 형식의 변화는 농민전쟁 만큼이나 폭동적인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② 성만찬 논쟁에서 루터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현재 한다’고 믿지 않는 자들을 사탄이라 경고하고 이들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49.)고 까지 주장 하였다.

③ 쯔빙글리는 요6:63에 근거하여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육체가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는다. 그리고 이 동일한 육신이 주의 만찬에 있고 우리들에게 먹도록 주어졌다. 나는 이것도 믿는다.”(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50.)
고 하였다.

④ 루터는“성육신이나 삼위일체, 혹은 그리스도 자신의 본성 등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바뀔 수도 없음을 알 고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이 참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다. 어떠한 텍스트, 어떠한 해석, 어떠한 인간 이성도 이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없다.”(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50)고 하였다.

⑤ 그러나 루터도 미사가 구원의 행위라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 하였다. 오직 사제만이 미사의 집례를 행할 수 있으며 또한 미사가 희생제사라는 의미는 반대하였다.



1525. 4-6

⌜평화를 권면함⌟
① ⌜평화를 권면함⌟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군주와 영주들에게는 농민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한 것에 대하여 정죄하였다.
농민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반대하였다. 농민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복음과 자유에 호소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살인적이고 도적질하는 농민들 무리⌟
⌜농민들을 반대한 엄한 책에 대한 공개 서한⌟


② ⌜살인적이고 도적질하는 농민들 무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일 농민들이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군주들은 그들을 죽여라. 그것은 마치 미친 개를 잡는 것과 같다.

③ ⌜농민들을 반대한 엄한 책에 대한 공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 글로 말미암아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까지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거의 한 마디도 철회하지 않았다. 루터는 폭동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에게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군주와 영주들을 공격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영주는 농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231.


④ 그리고 농민들의 반란(1524-1525)은 반 카톨릭 운동이 아니고 반 신부 운동이었다. 당시 신부들과 사제들은 착취 계급으로 알려졌다. 농민 소동은 이러한 착취를 일삼는 감독들을 물리치라는 운동이었으며, 교황이나 교회를 물리치라는 운동이 아니었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73.

이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불만을 분출하는 데 있어 루터의 사상을 자기들의 생각에 맞도록 적용하였을 따름이다. 루터는 불의를 행하는 군주들을 책망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라 하였다.

루터는 이를 목격하면서 폭력에 호소하는 일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271.


⑤ 이제는 루터가 농민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다



1525. 5. 5. 선제후 프리드리히(Frederick the Wise) 사망
후임 선제후 요한



1525. 6.13.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

- 1525년 가톨릭의 수녀로 있던 16년 연하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5남매를 두었다.
모든 면에서 카타리나는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경제 문제나 가사 문제로 짐이 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가 맡은 큰 개혁 사업에 숨은 보조원 역할을 하였다.



1525. 12. ⌜노예 의지 = 의지의 속박에 관하여⌟

① 루터는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응수 하였다.
참다운 의지의 자유는 신적인 속성을 가진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짐승과 같다. 만일 하나님이 그 위에 앉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만일 사탄이 올라타게 된다면 사탄이 뜻하는 대로 갈 것이다. “의지는 그 중 어떤 곳으로 태우고 갈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거기에 누구가 탈 것인가를 놓고 싸움을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적 투쟁의 결과는 결코 의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승리하셨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p.247-248.


② 루터는 심지어 에라스무스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1526.
여름
대중적인 인물 루터

① 루터는 이미 독일에서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를 지지하는 많은 무리 때문에 지역적인 저항이 두려워서 통치자들은 보름스 칙령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 1522년에 새롭게 등극한 교황 아드리안 6세는 슈파이어에서 열린 국회에 보름스 칙령을 공표하고 강화하라는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의 공의회에 호소하게 된 쪽은 정치였다.

② 두 명의 프로테스탄트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카를슈타트, 농민들, 스위스인들, 그리고 에라스무스와의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루터와 등을 돌렸다.

③ 게오르그 대공은 수도원 규칙을 어긴 수도사들과 수녀들을 마치 범죄자 다루듯이 체포하였다.

④ 루터는 심한 병에 걸리고 정신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유럽 전역에 전염병이 있었다.
이 때 루터는 목회자들이나 공공인들은 피난해서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부인은 남아 있는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곡함




1527. 년말 새로운 선제후 요한의 교회 방문에 대하여 협상

① 이 방문의 목적은 모든 교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자 함에 있었다.

② 루터는 여기에 협조하였으나 아그리콜라(Agricolla) 루터의 제자였고, 루터의 고향 아이스레벤에서 목회하였다. 이는 율법폐기론자였다.
는 교회의 자유를 압박한다 하여 반대하였다.



1528. 3월 방문 조항 출간: ⌜주의 만찬에 대한 대 고백⌟


1528. 12월 교회 방문자로서 개인적인 예배

1529. 1월 ⌜소교리 문답⌟, ⌜대교리 문답⌟ 쓰기로 결심

① 각 지역을 방문하고 난 후 루터가 느낀 것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의 예배보다는 여자와 폭음을 즐기고 있었다. 일하지 않고 빈둥대고 아내를 폭행하였다. 젊은이들의 난잡한 행동들 뿐 이였다.

② 시골에 있는 일반 민중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고,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가르치기에 부적당하고 무자격한 자들이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조직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결심에서 ‘소요리 문답’과 ‘대요리 문답’을 쓰기로 하였다.



1529.4.19. 슈파이어 국회에서 프로테스탄들 항거

신성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 카를로스 5세 (Carlos V, 1500-1558, 스페인)의 비호 아래 대공작 페르디낭(카를로스의 동생임)은 슈파이어 국회를 소집하였다.
① 루터와 루터의 추종자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② 작센의 선제후 요한을 비롯하여 6명의 제후들은 종교 문제는 영주들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라며 페르디낭의 요구를 거절하였다.(protestant)
③ 그 결과 스페인 군대가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6명의 제후들은 정치적 군사적 연대를 성사시켰다.



1529. 10.1.-4. 마르부르크 논쟁

말부르그 신조

1529년 독일 허센의 제후 빌립(Philipp, 1504-1567)의 소집으로 말부르그 회담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 회담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위협에 맞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의 합의를 보기 위해 모인 회담이었다.
회담 결과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위격, 이신칭의, 세례, 선행들, 신앙고백, 세속권위 같은 교리들에 관한 전반적인 의견 일치를 표명한 15개조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제 15항의 성만찬에 관해서는 완전 일치를 보지 못함으로 결과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① 쮜리히의 츠빙글리도 참석하였다.
② 성만찬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것은 내 몸이다’의 의미를 츠빙글리는 ‘의미 한다’로 해석하고, 루터는 ‘이다’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③ 성만찬 교리에 대한 것 외에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의 합의를 보았다.



1530. 4-8월 아우구스부르크 국회 동안 코부르크(Coburg)에 머뭄

① 카를로스 5세는 교황 클레멘트 7세를 가택 연금 시켜 놓은 채 제국 내의 종교적 갈등과 분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독일로 귀환하여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국회를 소집하였다.

②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신학자 루터로 하여금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도록 요청하였다. 루터와 동료들은 3월 말경 먼저 선제후에게 고백문을 보내고 아우구스부르크로 향하였다.

③ 루터는 아직 파문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신분 보호를 위해 아우구스부르크 근처 지방니 코부르크에 머물게 된다.

④ 5월에 ⌜아우구스부르크에 모인 성직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소책자를 발간한다.
“경건하고 선하신 카를로스에게 동정을 보내자. 그는 수많은 야수들과 개와 악마들 사이에 앉아 있는 무수한 어린양 같도다”(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82.)하고 하면서 성직자들을 조롱하였다.



1530. 6. 25. 아우구스부르크 국회에 맬랑히톤이 ⌜아우구스브루크 고백⌟을 제출함
보름스 칙령이 제국의 포고문 속에서 루터의 저술들을 불태우고, 독일에서 인쇄된 모든 책들은 교회의 검열을 받도록 하였다. 이 시행을 1529년에 강력하게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6제후와 14개 자유도시들은 4월 19일에 회집하여 국회의 결정에 대해 공식적인 ‘항의(protestation)’를 제기하였다. 그들을 ‘프로네스탄트(protestants, 항의자들)’라 불리워졌고, 그 날이 개신교회의 공식적인 출범일이고도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Georges Casais, ⌜루터와 고백교회⌟, 이오갑 옮김, 솔로몬, 2002. p.175.)


1530년 황제 칼 5세는 아우구스불그에서 로마 교회와 개혁파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마침내 교황이나 황제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루터의 입장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 최초로 명문화된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이 인정되었다.

① 여름에 아우구스부르크 국회가 소집 됨
② 맬랑히톤이 루터의 심사와 가필 후 ⌜아우구스브루크 고백⌟ 조규현, ⌜아우구스부르크 고백⌟
을 아우구스부르크 국회에 제출함.
③ 이 고백문이 낭독되는 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그 고백의 마지막 한자까지 지지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1530. 7. 12- 8.3. 엑크(Eck)의⌜아우구스브루크 고백에 대한 반박⌟

① 종교개혁은 전통과 성경의 권위와의 싸움이었다. 전통을 따르는 로마가톨릭과 성경을 따르는 루터주의자들과의 갈등은 끝이 없었다.
② 7월 12일 엑크(Eck)는 ⌜아우구스브루크 고백에 대한 반박⌟을 황제 카를로스에게 전달함.

③ 그러나 엑크(Eck)의 반박으로 칼5세는 엑크의 주장을 받아드려 아우구스부르그의 협약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1531년 4월까지 철회기간을 주었고 모든 지역은 교회적 원 상태로 돌아올 것을 지시하였다. 새로운 교리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나 책을 소유한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위협하였다.




1531. 2.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cher Bund)

①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슈말칼텐에서 회동하여 카를로스와 전쟁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황제가 공격할 경우 6년 동안 서로 군사적 원조를 할 것을 약속하면서 직접적으로 황제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다. 이 연맹의 주도적 인물은 허센의 제후 필립 공작(Philipp, 1504-1567)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I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였다. 거기에 6명의 다른 제후들과 10명의 도시 대표들이 가세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에 참여한 도시는 안할트(Anhalt), 막데부르크 (Magdeburg), 브레멘(Bremen), 포메른(Pommern),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하노버(Hannover), 함부르크(Hamburg),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켐프텐(Kempten),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등이다.



1531.4.
⌜친애하는 독일인들에게 고함⌟

① 학생들이 탁상담화를 적기 시작함
② 루터의 건강이 쇠약해짐
③ ⌜친애하는 독일인들에게 고함⌟
- 일반 사람들은 종교적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고, 무식한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의 의무에 불성실 하였고, 수도원은 텅 비고 잡초만 무성하였고, 이렇게 무질서와 혼돈한 사회였다.

-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당부하였다. 모든 소년들이 학교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1532. 1. ⌜남몰래 스며드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① 편지글의 내용이다.
② 재세례파는 사탄의 도구요 교회의 파괴자로 보았다.
- 재세례파들은 ‘교회에는 죄인이 섞여 있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주장을 루터는 비판했다.

- 1526년 ⌜독일 미사⌟에 대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 서로 존경하며,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완고한 사람을 몰아내는 회중을 그리워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공동체를 감히 꿈을 꾸어서도 안 되고, 그러한 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센 사람들을 다 모아도 그러한 교회를 만들기에는 불충분 할 것이다.”(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299.)


1532. 5. 제국 내에서 종교적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협상이 시작되다.

카를로스 황제가 종교적 평화를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슈바인푸르트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카를로스는 터키와 싸우기 위해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1532. 7.23.
프로테스탄트들은 다음 번 공의회까지 종교적 관용이라는 조건하에서 터키와 싸우는 데 협럭하기로 함.


1532. 8월 3일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분간 독일 내에서 종교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을 공인하는 조건으로 카를로스 5세의 요구에 응하여 당분간 휴전에 들어갔다.



1533 게오르그 공작의 분노

① 영주 게오르그 공작은 로마 가톨릭 신앙에 투철한 인물이다. 따라서 루터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② 서로가 반박문을 가지고 논쟁을 시작하였다. 루터는 “이 순간부터 내가 얼마나 악한 말로 가득차 있으며 교황절대주의자들을 저주하는 지를 말할 것이다. 이날부터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이 이단자들을 비난하고 저주하느라 바쁘기로 마음 먹었다. 만일 성서가 지신이 믿는 바대로가 진실이라면 자기와 다르게 가르치는 자들은 터키인들 못지않게 악마였다.” 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p.313-314.
라고 하였다.

③ 이에 격분한 게오르그 공작은 그 분노가 1533년 봄에 폭발하였다. 라이프찌히 시에 가톨릭 신앙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색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토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④ 라이프찌히 사람들은 루터에게 대응 방도를 구했고 루터는 절대로 게오르그의 명령에 협력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후임으로 요한이었고 요한의 후임이 그의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였다. 29세의 젊은 나이의 요한 프리드리히는 어릴 때부터 루터를 존경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를 영적 아버지로 생각하고 선제후가 된 후 루터에 대하여 모든 일에 아주 협조적이었다.
그래서 게오르그 공작은 그의 친척되는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루터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는 게오르그 공작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을 전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순수하게, 신앙적으로 선포하도록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확신을 죽는 날까지 견지할 것입니다”(James M. Kittelson, ⌜개혁자 말틴 루터⌟, 김승철 옮김, 컨콜디아사, 1995. p.318)


1534. 완전한 독일어 성서 발행

루터는 풍부한 히브리어의 특징과 훌륭한 점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로 잘 번역할 수 있었다. Heinrich Bornkamm⌜루터와 구약성경⌟, 엄현섭 옮김, 컨콜디아사, 2006. p.74.
또한 루터는 구약성경의 형식이나 언어의 특별한 설명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고전적인 사람들의 문학과 비교하였다. Heinrich Bornkamm⌜루터와 구약성경⌟, 엄현섭 옮김, 컨콜디아사, 2006. p.80.



1535. 비텐베르크 신학부에서 안수를 받을 수 있음

- 점차 종교개혁적 교회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많은 설교자가 필요했다.
- 루터의 요청에 의해 선제후는 주교가 없는 곳에서는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부에 와서 시험을 치르고 안수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 루터가 신학생들(설교자들)에게 요구한 사항

① 훌륭한 설교자는 정확하게, 질서정연하게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②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③ 웅변적이어야 한다.
④ 음성이 좋아야 한다.
⑤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⑥ 언제 그만 둘지 알아야 한다.
⑦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⑧ 자신의 몸과 생명, 재산과 명예를 다 바쳐야 한다.
⑨ 모든 이들이 자신에 대하여 초조함을 갖이 않도록 해야 한다.

⇨ 신학생들에 대한 충고
책을 읽을 데에 너무 시간을 쓰지 말고, 밖에 나가 좋은 친구도 사귀고, 노래와 춤도 추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루터는 사탄이 기독교인의 고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1535.
11월

교황청 특사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가 독일 방문


① 1521년 보름스 국회의 소집 이후 독일 영주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기독교인 공의회를 요구하였다. 이는 독일 땅에서 열리고 교황이 지배하지 않는 그러한 공의회였다.

② 그러나 베르제리오는 교황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일 기독교인의 공의회는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공의회 문제를 가지고 협상을 하였으나 실패함.



1536. 5월
남부 독일 도시 대표자들과 비텐베르크 화약에 서명함

① 독일 전역이 ‘아우구스브르크 신앙 고백’을 중심으로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부 독일의 슈트라우스부르크 신학자들의 대표자들과 협의가 필요했다.

② 남부 독일 도시의 대표자들인 부써와 카피토가 비텐베르크에 와 루터와 만났다.

③ 성만찬 의 빵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져 먹고 이빨로 십혀지게 된다’ 것에 대하여 동의 하였다.

④ 부써와 카피토는 빵과 포도주를 받는 자는 ‘기독교인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고, 루터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가치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심지어 신앙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도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제공된다.’는 입장이었다.

⑤ 그러나 이튿날 부써와 카피토는 쯔빙글리의 상징설은 오류였음을 인정하고 루터의 입장에 남부측과 비텐베르크 양측이 의견에 동의함으로써 화해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 말하였다. 그리고 부써와 카피토는 울었다.



1537. 2월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의 화합:
슈말칼트 신조(Schumalkald Articles)

루터는 정부에 대한 항의는 옳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황제와 맞서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였고 정부에 대한 저항의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이 때 독일의 루터교 제후들이 힘을 얻었다.

① 루터의 제자인 아그리콜라는 ‘율법페기론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선행은 무시되어도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율법 자체는 법정의 것이었지 강단에는 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② 종교개혁의 양대 세력은 작센과 헷센이다. 특히 헷센의 선제후는 종교개혁이 전 유럽에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양대 세력이 비텐베르크 화약(和約)에 완전히 신앙의 일치한 것은 아직 아니었다.

슈말칼덴은 한적한 소읍이었고 이 양대 세력이 만나기 쉬운 곳이었다.

③ 교황청의 요구로 소집될 만투아(Mantua) 공의회를 앞두고 우선 슈말칼덴에서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이 모였다. 여기에서 영주들의 요청에 의해 루터가 ‘슈말칼트 신조(Schmalkald Articles)’ 조규현, ⌜슈말칼트 신조⌟
를 보냈다. 슈말칼트 신조는 종교개혁의 강령을 이루었다.

* 슈말칼트 신조의 주요 내용

이신득의, 죄, 율법, 회개, 복음, 세례, 연옥, 순례, 수도생활, 성인들에 대한 기도 단죄, 제단의 성례, 신앙고백, 파문, 서품과 소명, 사제들의 혼인, 교회, 수도 서약들, 인간 전승들, 미사의 정죄, 수도원 삶의 해로운 성격, 교황청, 교황주의자들의 거짓 회개,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행위 비판, 마귀” 등이다. 특히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이자 마귀의 사도로 낙인찍는다. 그는 과거의 신조들을 간략히 재 확증하면서 어떤 양보도 없었다. 루터는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에 이어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하였다.


④ 이 때 루터의 건강이 임종에 가까울 정도로 극히 나빴다. 멜랑히톤이 루터의 조언을 받아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에서는 로마천주교의 전통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이 ‘슈말칼트 신조’에서는 루터의 유언장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신학을 분명이 하였다. 로마 천주교의 차이가 분명함을 정리하였다.
⑤ 몇 차례 동맹회의가 개최된 이후, 루터의 건강이 회복되어 드디어 선제후 16명, 백작 6명, 황제와 교황의 사절단, 프랑크와 덴마크 왕의 사절단, 제국도시 대표 28명, 그리고 마르틴 루터와 멜란히톤을 위시한 신학자 42명이 모여 ‘개신교 교회의 일치신조서’를 작성하고 ‘슈말칼덴 조항’으로 공식 선언된다.



1545. 12.13. 트리엔트 공의회

①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 공의회에 개신교 제후들은 참석을 거부한다.

② 1532년 슈바인푸르트에 칼5세와 프로테스탄트 영주들과 체결한
종교협의는 칼5세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군사행동으로 결렬된다.

③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을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은 1544년 그의 소 논문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에서 “전 기독교가 우상 예배로 부패되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이 만들어낸 것을 섬기며 전합니다. 수다한 종류의 미신이 팽창하여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가톨릭의 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한 ‘반동종교 개혁(Counter-Reformation)’이다. 그러나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자체의 정화운동 차원에서 그들의 교리와 신학을 공고히 하였다.

1. 가톨릭의 신학의 입장

1)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전통(외경을 포함한 교회의 전승들)을 포함한다.

⇔ 오직 성경


2) 칭의는 인간의 선행과 하나님의 은총이 합력하여 이루어 진다.

⇔ 오직 믿음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For we maintain that a man is justified by faith apart from observing the law.


3) 교회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만날 수 없고, 성사 없이 하나님과 상통할 수 없다.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7가지 성사(성례)가 있다.

(1) 세례 성사
(2) 견진성사 - 견인의 교리
(3) 성체성사 - 영적 양식(빵과 포도주)
(4) 고해성사
(5) 병자성사(종부성사) - 중병으로 신음하는 신자와 죽음에 임한 신자를 위로함
(6) 신품(神品)성사 - 사제로 성사와 미사집전, 교회에 봉사하는 직능을 수여하는 성사
(7) 혼인성사

⇔ 세례와 성만찬
⇔ 화체설 부인 ⇛ 기념설, 임재설


4) 고해성사에는 통회(죄를 깊이 뉘우침), 고백, 보속(벌 받음)이 필요한 것이며, 죄를 사하여 주는 권한은 그리스도로부터 주교와 사제에게만 주어져 있다.

⇔ 사죄의 은총은 오직 그리스도에만 있다. 중개자가 필요 없이 오직 믿음으로 죄사하심을 얻는다. 이는 오직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일 뿐이다.



1546.12.18. 아이스레벤에서 루터가 세상을 떠나다.

요나스 : “선생님,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 : “그렇습니다(Ja!)"



1547. 7. 슈말칼덴 전쟁

15개월 만에 전쟁에 패하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1555. 9. 25.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 회의(Augusburger Religionsfriede)

① 황제와 루터파 지지파 사이의 대화합이다. 1517년 10월 31일로부터 38년만에 이루어진 개신교의 승리의 날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끝났다.

② 칼 5세의 동생 페르디난드 1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③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 자기 영지 내에서는 자유스럽게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다.



1580. 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cord)

① 루터교회는 루터교의 정체성을 찾고자 1580년에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작성하였는데, 루터교회의 기본 원리를 잘 보여준 신앙고백이다.

② 루터파를 이끄는 성직자와 군주, 귀족과 시의회가 일치신조서를 채택하였다. 루터교회의 모든 공식 교리문서들이 포함된 일치신조서는 전 세계 루터파의 신앙 고백적 표준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③ 일치신조는 루터가 주장한 인간 의지의 노예상태 교리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재천명했으나, 그의 예정론은 누그려뜨렸다.

④ 사실 모든 개신교의 정통 신학에서 각각의 신앙고백서는 상당 부분 루터에게 빚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렇다.




Ⅱ. 루터의 주장들

1. 가톨릭의 전통에 관하여

1) 성인들의 공로(Treasury, 보고(寶庫))

죄는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선을 통하여 구원이 될 수 있는 데 선은 협동적인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동정녀, 성인들의 선이 보고(寶庫)를 이루고 있다. 이 양도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특별히 교황을 통해서 그 효력이 발생한다.

⇨ 그 효력의 증가는 성인들의 성해(聖骸)를 방문하는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인들의 유골 하나 하나에 연옥의 형기를 4,000년 감해 주는 면죄의 효과가 있다고 정해 놓았다.

로마에는 특히 그런 보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① 성 칼리스투스 지하 납골당에는 40명의 교황과 76,000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다.
② 모세가 본 떨기 나무 가지가 하나 있다.
③ 헤롯 왕 때 베들레헴에서 죽은 아기 뼈가 300개가 있다.
④ 성 바울의 쇠고랑
⑤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성 요한의 머리를 짜를 때 사용했던 가위
⑥ 유다가 받은 동전 하나를 보관한 교회
⑦ 유다가 목매달아 죽은 사다리

⇨ 면죄부(免罪符)


2. 95개조 논조

1) 모금 목적에 대한 이의(異議) - 모금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을 것이 아니라 지방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베드로 성당에 출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베드로 대 성당을 팔아서 그 돈을 면죄부로 착취당하는 빈민에게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성 베드로의 유골을 예배당에 안치하는 데 돈을 쓴다는 그럴 듯한 의도는 잘못이라는 점을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우리가 먼저 가꿔야 할 것은 지역 교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이요,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은 베드로 대성당이다. 관할 교회들이 약탈당하는 것보다 그게 아예 세워지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교황은 모든 교회에 면죄를 허락하는 것보다 한 교회에라도 선한 목자를 임명해야 옳다. 차라리 성 베드로 대성당을 팔아서 면죄부 상인들에 의해 가죽이 벗겨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편이 낫다.


2) 연옥에 대한 교황권을 부정하였다.

교황의 연옥 대한 권세와 죄나 처벌에 대한 사면권을 부정했다.

“성자(聖者)들의 공로(功勞)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는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를 받지 않아도 죄책과 처벌을 완전히 감면받는다. 처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교황은 자기 마음대로 양도할 여공(餘功)의 보고(寶庫)가 없기 때문이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02.



3) 죄인의 행복에 대한 고려(考慮)이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79.


“죄인이 면죄부를 삼으로써 행복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신자의 행복이다.


<믿음으로 구원된다.>

성인들에게 남아돌아가는 공(功)이 있다는 것은 천만 부당한 얘기이다. 면죄를 받는 사람은 그것이 쓸데없는 안도감을 불러드리는 바람에 구원이 방해를 받게 된다.
면죄부만 가지고 있으면 확실히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처럼 저주받은 사람은 없다. 인간은 저주 받아야하고 공포에 사로 잡혀야 하고, 연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연옥의 고통을 당하여야 한다. 이 혼란 속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이 믿음 없이는 교황에게 백번 사면을 받는다 해도 멸망 받은 자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102.

루터는 이 논제를 광고벽에 부칠 때 그것을 널리 뿌려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직 관심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단지 학자들을 초청해서 토론을 벌이고 저명 인사들을 불러 그 뜻을 명확히 밝혔을 뿐이다. 이것을 은밀하게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에 넘긴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p.105-106.




Ⅲ. 개혁자 루터(1483-1546)의 모습

1. 그의 신학의 이해

신학자 루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신학의 본질

신학은 하나의 충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취급하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크리스챤의 의(義)를 선행에 관련된 행위의 의(義)로부터 식별해 내는 것이 신학의 사명이라 할 수 있으며 결코 어떤 제도화된 교회나 교황을 변호하고 보호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28.



2) 신학과 하나님

신학(神學)에서 반드시 취급해야 할 과제는 죄 가운데 상실된 인간과 이 죄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의 관한 문제이다. 결국 인간과 하나님을 한 대립적 관계에서 관찰하게 된다. 즉 최고선인 하나님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을 생각하게 된다. 이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신학의 목표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29.




3) 신학과 그리스도

신학(神學)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밖에서 신학을 논의하거나 사색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고 해로운 것이다. 신학은 십자가가 서 있는 곳이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31.



4) 신학과 성서

생명과 의의 약속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수락하고 연구하는 것이 참된 신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충분한 지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말씀의 학생으로서 충실히 행하는 신학의 길이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30.


성서의 본문에 정통한 사람이 훌륭한 신학자이다. 성서 연구에는 분석적이며 조직적인 탐구가 있어야 한다고 루터는 지적한다. 건전한 신학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말씀의 중심 메시지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빛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35.


루터는 고백하길 20년간이나 신학 연구에 종사하고서도 아직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을 충분히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36.



5) 신학과 철학

철학은 신학에 소속된 것이며 결코 동등한 위치에 있거나 산학과 혼합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루터는 철학과 자연의 인식이 신학에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반대하였다.
이성(理性)은 아름다운 빛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의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하거나 보여주는 데는 전혀 어둡고 무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이(철학도) 아무리 세상 사물에 밝다고 해도 성서의 두 가지 중요한 기본 교리인 율법과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원용, ⌜말틴 루터⌟, 대한기독교서회, 1977. p.138.








부록 참고


< 95개조 논조 >


Ⅰ. 내용


루터의 95개조 논조 http//user.cholian.net/-b1205/jaryosee/95articles.htm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하지만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inner repeutance)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여도, 즉 참된 내적 회개를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5. 교황은 자기의 권위나 교회 법의 권위에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벌도 가감할 수 없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음을 선언하신 것과 같이 자신의 판결에 위임된 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죄도 용서할 수 없다. 교황의 권한을 넘는 죄는 교황의 용서로 사하여 지지 않는다.

7. 하나님은 인간이 겸손해져서 그의 대목(代牧)인 사제들에게 복종치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아니하신다.

8. 속죄의 법은 단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다. 그 법에 따라, 죽은 자의 죄가 사하여질 수는 없다.

9. 그러므로 교황이 그의 교령(敎領)에서 언제나 죽음과 필요의 항목을 제외한다면, 교황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은 우리에게 자애롭다.

10. 죽어서 가는 연옥을 교회법의 벌로 삼는 사제들은 무식하고 악한 이들이다.

11. 교회의 법의 벌을 연옥의 벌로 바꾸는 가라지가 감독들이 자는 동안에 분명히 뿌려졌다.(마 13:25)

12. 이전에 교회법의 벌은 진정한 회개의 시금석으로서 사면 후가 아니라 그전에 가해졌다.

13.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교회법에 관한 한 이미 죽었으며 그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갖고 있다.

14. 죽어가는 사람에 있어서 불완전한 경건이나 사랑은 반드시 커다란 불안을 수반한다.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두려움은 더욱 크다.

15. 이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가 바로 절망의 공포이므로 연옥의 형벌로써 충분한 것이다.

16.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의 차이는 절망, 두려움 그리고 구원의 확신간의 차이가 같다.

17.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두려움이 감소하여야 하며, 사랑은 증가하여야 할 것 같다.

18. 또 연옥에 있는 영혼이 공과(功過)의 영역밖에 있는지, 즉 사랑을 더 입을 수 없는지의 여부는 이성으로도, 성서를 통해서만도 입증되 지 않는 것 같다.

19. 또 연옥에 있는 영혼들 중 모두는 아니라 해도 얼마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입증되 지 않을 것 같다.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형벌의 무조건적인 사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실제로 모든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할 수 있는 형벌에 국한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인간이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22. 사실상 교황이 교회법에 따라 이 세상에서 치러야 할 벌을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하여 줄 수는 없는 것이다.

23. 모든 벌의 사함이 가능하다할지라도 그것은 오로지 가장 완전한,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될 뿐일 것이다.

24.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로부터 구원이라는 어마어마하고도 무분별한 약속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갖는 일반적 영향력은 주교나 사제가 자신의 교구에 대해 갖는 특별한 영향력에 상응하는 것이다.

26. 교황은 실제 자신이 갖지 못한 결정적인 열쇠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보를 통해서만 연옥에 있는 영혼의 죄를 사할 수 있을 뿐이다.

27.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면, 욕심과 탐욕도 분명히 증가한다. 그리고 교회의 중보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29. 성 세베리누스(St.Severinus)와 성 파샬(St.Paschal)에 관한 전설에서처럼,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는지의 여부를 누가 알겠는가?

30. 누구도 자신의 회개의 완전성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더군다나 속죄의 완전성 여부는 더욱 더 확신할 수 없다.

31. 실제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실제로 회개를 하는 사람만큼이나 드물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32. 면죄부를 사므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이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특별히 경계하여야 한다.

34. 왜냐하면, 그 사면의 은혜는 오로지 인간이 설정한 성례의식에 대한 벌에만 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하거나 고해신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허가증을 사려는 이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비기독교적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36.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

37.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았든 죽었든 모든 그리스도의 축복과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축복과 용서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제6조]에서 언명했듯이, 이는 하나님의 용서의 선포 이기 때문이다.

39. 아무리 박식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면죄부와 동시에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을 설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값을 달게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면죄부는 벌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벌받 기 싫어하게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는 벌받기를 싫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41. 교황의 면죄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행위들보다 더 낫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42. 교황은 면죄부를 사는 일이 자선사업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43. 그리스도인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44. 사랑은 행함으로써 더욱 커지고, 인간은 이를 통해서 더욱 선해지나, 면죄부를 통해서는 인간이 선해질 수 없고 단지 벌을 면할 뿐이기 때문이다.

45. 궁핍한 사람을 보고도 이를 지나치며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알 아야 한다.

46. 그리스도인들은 생계의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자신의 가족을 위해 충분히 저축하여야 하며, 결코 이를 면죄부에 낭비하여 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7. 그리스도인들 면죄부를 사는 것이 자유선택의 문제이지, 명령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48.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면죄해주는 데 있어서는 돈보다 경건한 기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9.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면죄부가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때에만 유용한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한다면 매우 해로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50. 교황이 면죄부 교사들의 진상을 안다면, 그는 자기 양의 뼈와 살 그리고 그 가죽으로 성 베드로 사원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원이 재로 화하기를 원했을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51. 교황은 면죄부 판매자들로부터 돈을 갈취당한 많은 이들에게 성 베드로 사원을 팔아서라도 돈을 나누어 주기를 원할 것이며 또 원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한다.

52. 비록 면죄부 담당 주교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자기 영혼의 안전을 위해 면죄부에 의한 구원을 믿는 것은 헛된 일이다.

53. 면죄부 판매를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금하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다.

54.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다.

55. 극히 무의미한 것인 면죄부가 한 단어, 한 문장, 한 구문으로 표현된다면, 매우 중요한 것인 복음은 백 단어, 백 문장, 백개의 구문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56. 교황이 면죄부를 파는 교회의 보물은 그리스도의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57. 면죄부가 이 세상의 보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많은 면죄부 판매자들이 이를 마음대로 나누어 주기보다는 이를 긁어 모을 뿐이기 때문이다.

58. 이는 또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 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사람에게는 은혜를 ,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스(St.Laurence)는 교회의 가난한 자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 당시 말의 어법에 따른 것이다.

60.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보물이라는 우리의 말은 충분히 숙고한 결과이다.

61. 왜냐하면 분명한 것은 교황의 권한이 자신에게 부여된 벌과 재판을 면해주기에 충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증언인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하지만 이 보물은 가장 싫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처음된 자를 나중된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마20:16)

64. 한편, 면죄부의 보물은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나중된 자를 처음된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65. 그러므로 복음의 보물은 이전엔 사람을 위해 부를 낚았던 그물이었다.

66. 면죄부의 보물은 지금 부를 위해 사람을 낚고 있는 그물이다.

67. 선동가들이 최고의 은혜라고 주장하는 면죄부는 실제로는 면죄부가 이익을 증진시킬 때에만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68. 하지만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신앙에 비교해 볼 때 가장 무의미한 은혜에 불과하다.

69. 감독과 사제들은 교황 면죄부 사절들을 기꺼이 그리고 매우 경건하게 맞아들여야 한다.

70. 하지만 그들은 이 사절들이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것 대신에 자신들의 생각을 설교하지 않도록 보다 더 축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71. 교황의 면죄부에 관한 진리를 거스리는 이는 파문되어야 한다.

72. 하지만, 면죄부 사절의 욕심과 방종을 경계하는 이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73. 교황은 여하튼 면죄부 판매에 해를 끼치는 이들을 혹독하게 꾸짖을 수 있다.


74. 하지만, 교황은 이보다는 더욱 더 거룩한 사랑과 진리에 해를 도모하기 위한 구실로 면죄부를 사용하는 이들을 꾸짖기를 원한다.

75. 면죄부를 과대평가하여 인간이 아무리 못할 짓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어머니를 범했다 할지라도 면죄부가 그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76. 우리의 주장은 정반대로 교황의 면죄부는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77. 성 베드로가 지금의 교황이라 할지라도 더 큰 은혜를 베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와 교황을 동시에 모독하는 것이다.

78. 우리의 주장은 반대로 지금의 교황, 또는 어떤 교황이라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씌어진 대로 복음과 영력 그리고 치유의 은사 등 훨씬 더 많은 은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79. 교황의 성의에 그려진 십자가와 면죄부 사절이 세운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80. 그러한 말을 퍼뜨리는 감독, 사제 그리고 신학자들은 다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81. 이 무분별한 면죄부의 강조 때문에 아무리 박식한 사람이라도 세인들의 중상 또는 날카로운 질문으로부터 교황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82. "교황이 교회를 세우는 데 드는 하찮은 돈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영혼을 구속한다고 한다면, 그는 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절박한 필요를 들어주거나, 또는 거룩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연옥을 완전히 비우지 않는가? 후자는 가장 사소한 것이 아닌가?"

83. 또, "이미 구속받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데, 왜 죽은 자의 장례 미사나 기념 미사는 계속되는가? 또, 왜 교황은 그러한 이유에서 바쳐진 기부금을 돌려주지도 않고, 이의 취소를 허락하지도 않는가?"

84. 또, "돈 때문에 불경건한 자와 적들로 하여금 연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경건한 영혼을 살 수 있도록 하면서, 오히려 경건 하고 사랑스런 영혼을 위해서는, 즉 순수한 사랑의 목적으로는 이를 행치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 가?

85. 또, "이미 오래 전에 최소되었고, 사실상 사문화되었으며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는 회죄총칙(悔罪總則) 회죄총칙은 여러 사람이 저술하였는데 콜롬바누스, 피니안, 테오도르, 쿠메안 등이
대표적이다.

"회죄총칙"(Penintential)에 따르면 성적 방종에 대한 처벌의 범위는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거기에도 대략적인 원칙은 있는데 성직자가 이런 죄를 지었을 경우 여러 가지 정황이 참작되었지만, 평신도보다 더 큰 벌을 받아야 했다.

1) 유부녀, 2) 처녀, 3) 과부 의 순서이다.

1) 유부녀 -
콜룸바의 회죄총칙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아내로 하여금 아이를 배도록 만든 사람은
3년 간 회개를 해야 하며, 그 기간에는 "맛있는 음식은 물론 자신의 아내와의 잠자리
도 자제"해야 하고 그 유부녀의 남편에게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2) 처녀-
처녀와의 경우에는 그 기간이 2년이며, "그녀를 모욕한 대가"를 그 녀의 부모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 처녀와 결혼한다면 그 기간은 1년으로 줄어든다.

3) 과부-
과부와의 경우에는 회개의 기간이 1년이다. 확실히 성경에 과부를 우대(?)하라고
한 내용을 이루게 한 것 같다.


이 왜 면죄부판매를 통해 아직도 살아있고 강력한 힘을 갖는 것처럼 통용되고 있는가?"

86. 또, "오늘날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Crassus)보다도 훨씬 부자인 교황이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돈으로 이 성 베드로 사원을 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87. 또, "이미 전적인 회개를 통해 완전한 구속과 축복을 받은 이들에게 교황은 또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축복하겠다는 것인가?"

88. 또, "교황이 지금 하루에 한 번 모든 신자들에게 베풀고 있는 사면과 축복을 하루에 백 번을 한다고 하여 얼마나 더 큰 축복이 교회에 임 하겠는가?"

89. "교황이 면죄부를 통해 돈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구하고 있다면, 왜 그는 지금까지 행해 온 똑같은 효력을 갖는 사면과 특사를 중지하는 가?"

90. 세인들의 날카로운 논박을 오직 힘으로만 억누르고, 이를 논리적으로 해소치 않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적들의 웃음거리고 만드는 것이 며 그리스도인들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면죄부가 교황의 마땅한 뜻과 생각에 따라 설교된 것이라면, 이 모든 의문들은 이미 해결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미 없어져야 했을 것이다.

92.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향하여 평안하지도 않은데 "평안하라, 평안하라"하는 모든 선지자들은 다 물러가야 한다.(레 6:14)

93.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십자가가 없는 곳에서 "십자가, 십자가"를 외치는 모든 선지자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다.

94. 그리스도인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형벌, 죽음 그리고 지옥을 거치면서 부지런히 따르도록 교훈되어야 한다.

95.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평화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행 14:22)



Ⅱ. ‘95개조 논조’에 나타난 루터의 사상


1. 참회에 대하여

1) 성례전으로서 고해성사가 회개나 사죄로 이해될 수 없다.(2)
2) 참된 마음의 참회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4)
3) 고해는 죽은 자에게는 어떠한 효력도 없다.(8)


2. 교황의 사죄권에 대하여

1) 감독의 권위와 사도권의 계승

초대교회는 평신도들이 감독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성직자와 함께 지위를 나누며 공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서요한, ⌜초대교회사⌟ 그리심, 2003. p.572.

교회가 부흥 확장됨에 따라 교회의 정치 구조 및 행정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감독들의 권위를 강조하며 이 권위 아래 교회 제도를 발전시켰다.

가톨릭이라는 용어는 2세기 초 안디옥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 of Antioch, 35-107년경)에 의해 최초로 사용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어디나 가톨릭 교회가 있다(Wherever Jesus Christ is, there is the Catholic church)"고 하였다. 이 교회는 2세기 말부터 각 지역이나 개 교회와 대조되는 보편 교회로 점차 조직화 되었다. 서요한, ⌜초대교회사⌟ 그리심, 2003. p.213.


처음 사도들이 사망하고 난 후 증인들이 살아지자 복음 증거자들의 권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일단 감독들의 권위를 존중하며 이 권위 아래 교회 제도를 발전시켰다. 신자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랐듯이 모두 주교들을 따라야 했고 장로들을 따라야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교들은 사도들의 법적 계승자들로 점차 신자들에게 인식되어 발전되어 갔다.

사도적 계승권을 가진 감독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신자들 위에 군림하였다. 특히 감독 중의 감독인 로마 교황은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초기 교회의 대표적인 감독은 115년 주교로 임명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였다. 그는 순교에 앞서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신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셨듯이 모두 주교들을 따라야 한다. 또한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랐듯이 장로를 따라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듯이 집사들을 존경해야 한다. 또한 어느 누구도 주교의 도움 없이는 교회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은 주교와 혹은 그가 위임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집행하는 성찬식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모든 곳이 보편교회이듯 주교가 출석하는 곳에는 회중들이 회집하여야 한다.” 서요한, ⌜초대교회사⌟ 그리심, 2003. p.213.



2) 장로란?

① 근거 --- 행11:29-30, 행14:23
② 2세기까지 장로들은 감독으로 혹은 감독은 장로로 불려졌다.
③ 빌1:1, 딤전 3:1-11에는 감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장로에 대한 언급은 없다.
④ 딤전5:17, 디도서1:5-9 바울은 장로직과 감독직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⑤ 순교자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직과 장로직을 최초로 구분하였다.

역사적으로 가톨릭은 A.D 95년경에 시작되는데 그 후 120년경부터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 시기에 안디옥 교회와 소아시아 여러 교회는 감독을 중심으로 조직되다가 150년 이후부터 전 기독교회에 보편화되었다.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교구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요한, ⌜초대교회사⌟ 그리심, 2003. p.569.




3) 교황의 정의

계시(啓示)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기원(起源)에서 두 원천 (源泉)인 성서와 성전(聖傳)이 있다. 교회에는 두 보화(寶貨)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서와 기록되지 않은 성전(聖傳)이 있다. 무형(無形)한 성전(聖傳)의 현존(現存)을 알려주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교부(敎父)’들이다. 배승록, ⌜교부와 교회 ⌟, 대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5. p.13.

교황 ‘pope’은 헬라어 ‘papas(아버지)’에서 유래되었다. 이를 기초로 라틴어의 ‘papa’가 출현되었다. 이 용어는 교회의 모든 중요하고 존경받는 감독들을 가리켰다.
9세기 이후 로마 교회의 수장이요 절대 권력자인 교황에게만 사용되었다. 교황은 초기와는 달리 중세에 자신의 권한을 증대시켜 로마의 제국의 황제처럼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서요한, ⌜초대교회사⌟ 그리심, 2003. p.572.




4) 루터의 입장

(1) 교황은 하나님의 사죄를 선포하고 확증하는 것 외에 교황은 사죄권(赦罪權)이 없다.(6)


3. 연옥(煉獄, purgatory)의 형벌에 대하여

<중간기 상태>

성서는 주님이 공중 재림(살전4:17)하실 때 첫째 부활에 해당하는 순교자와 성도들의 부활(요5:25, 고전15:23, 살전4:16, 계20:6)과 산 자의 변화(고전15:51)로 들림(휴거)을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최후의 대심판(마25:31, 계20:11-15) 직전에는 둘째 부활에 해당하는 불신자의 부활(요5:28-29, 계20:12-13)이 있다.

그렇다면 육신의 사망과 부활 사이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그래서 종말론(eschatology)에서 중간상태(intermediate state)를 언급하고 있다. 중간상태에 대한 구약신앙과 신구약 중간시대의 신앙 그리고 신약시대의 신앙이 어떠하였으며 또 연옥사상에 관하여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1) 구약신앙

(1) 음부(Sheol:스올)
사자(死者)들은 어둠과 침묵 속의 하계(下界)인 음부로 내려간다.(시86:13, 잠15;24, 겔26:20, 욥10;22)

(2) 사자(死者)들은 그 곳(음부)에서 부족별로 새로운 사자(死者)를 영접한다.(겔 32;17-32)

(3) 음부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영역이 아니라 죽음의 방식을 가리키며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인도될(시16:9-11, 시73;24, 욥19:25-26)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번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신구약 중간시대의 신앙

(1) 음부는 의인들만 모이는 임시 장소(시14:6-7, 마카비하 7:9, 마카비하 14:46)

(2) 마카비의 기도(마카비하 12;43-45)

(3) 음부는 3곳이 있다(에녹스 22장)
의인이 있는 곳, 응보 받기 전에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 응보 받은 악인이 있는 곳.

(4) 의인은 하늘에서 천사들의 보호 아래 부활 때까지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악인은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다(에스라 4서 7:95, 바룩 2서 21:23)

(5) 삼층(三層) 구조의 우주로 인식하였다.

① 하늘 ---하나님의 거처
② 땅위 ---Sheol(사자(死者)가 머무는 곳
③ 땅 밑---Gehenna: 악인이 머무는 곳


3) 신약시대의 신앙

(1) 음부(Hades, hell. grave)는 Sheol과 같은 뜻이다.(마11:23, 눅10:15, 행2:27, 고전15:55)


(2) 삼층천(三層天)

① 아담이 죽어 일곱 하늘 가운데 세 번째 낙원(paradise)에 갔다. 낙원은 태초의 에덴 동산이다.
② 의인(義人)이 머무는 곳(부활이전 체류지): 아브라함의 품(눅16;22, 31)
③ 바울의 경험(고후12:1-4, 고후5;8, 빌1:23)


4) 가톨릭의 연옥설

천국과 지옥의 중간 영역.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와 세례를 받았으나 죽을 죄를 지은 자는 즉시 지옥으로 가지만, 세례를 받은 자로서 부분적으로 성화(聖化)된 자는 연옥에서 형벌을 받는다. 여기에서 일정 기간 고난을 받은 후에 완전히 성화되어 천국에 가게 된다.
그 고난의 강도와 기간은 사람마다 다른데 심지어 수천 년의 기간 동안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성당에 바친 헌금이나 봉사, 사제들의 기도, 죽은 사람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그를 위해 드린 미사 등에 의해서 그 고통을 완화하거나 기간을 단축시킬 수도 심지어 소멸될 수도 있다. 신성종, ⌜신학사전⌟, 도서출판 엠마오, 1986. p.552.

연옥이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이 되지 못한 성도가 연옥에 들어가 속죄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곳이다. 지상(地上)의 성도(聖徒)가 연옥의 부모형제 및 친지를 위하여 미사, 성례, 기도, 선행 등의 공덕을 쌓으면 이로 인해 연옥에서 받을 고통이 경감되거나 속죄에 보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서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최후의 심판이라는 성서적 교리와 대립할 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서로 간주하는 저작의 언급과도 명백히 어긋난다(솔로몬의 지혜3:1-5) 정인찬, ⌜성서대백과⌟, 기독지혜사, 1987. p.615.

신교에서는 이 연옥의 교리가 성경에 없기 때문에 거부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외경(外經) 마카베오 2서 12:39-45에 근거하여 인정하고 있다.


4. 면죄부(免罪符)

1) 가톨릭의 주장

중세교회는 그리스도의 공적(功績)만을 구원을 위한 충족한 행위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공적에 성자(聖者)들의 공적과 개인의 공적이 쌓여져서 구원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적과 성자들의 공적은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는 공덕을 행하였음으로 이 여분의 공적을 쌓아둔 창고(treasury of merits)가 있어 여기에서 공적을 끄집어내어, 연옥에서 일시적으로 형벌(temporal punishment)받은 자들의 고통을 면죄(indulgence) 시켜 준다고 하였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사함은 받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그대로 남아 연옥(purgatory)에서 일시적인 형벌을 통해 치유함을 받는다고 믿었다. 연옥은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이 가는 곳이요 여기에서 완전히 죄가 정화되는 곳이다.

구원이란 선한 행위들을 통해 획득되거나 또는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어떤 것이란 신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별히 면죄부(indulgence)와 관련해서는, 사죄(赦罪) 또는 ‘연옥의 형벌’에 대한 면죄 중 하나를 또는 이 양자 모두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죄악된 행위 때문에 영원히 받아야 형벌을, 교회에 적절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면하거나 감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는 방법으로서 회개, 고백, 속죄를 말하였다. 동시에 하나님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 3가지를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지원용, ⌜루터와 종교개혁⌟ 컨콜디아사, 1975. p.176.
중세인들은 지옥보다 연옥을 더 두려워하였다. 지옥의 형벌은 회개함으로 피할 수 있으나, 연옥의 형벌은 교회가 지정한 고행(苦行)에 의하지 않으면 피할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고행을 대신해 주는 것이 성전(聖戰)인 십자군에 참여하는 하는 것이며, 면죄부(免罪符)를 사는 일이었다. 1095년 1회 십자군 파견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 방법을 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알브레히트(Albrecht) 대주교는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것을 차지하면 독일의 수좌(首座) 대주교가 된다. 레오 교황은 베드로 대성전을 완공하여야 할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와 레오 사이에 협상이 필요했다. 교황은 알브레히트에게 그의 지역에서 8년간 면죄를 베푸는 특권을 허락하였다.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에 능수능란한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인 요하네스 테젤(Johannes Tetzel)에게 맡겼다.

1517년 9월 막대불크의 알브레흐트 대감독은 테젤을 시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모금을 위해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매년 11월 1일에 만성절(萬聖節)을 지켰다. 이 날은 고백의 날로서 모든 죄가 사면되는 날이다. 수집된 예수님과 사도들의 유품 및 유골이 전시되는 날이다. 이 날에 수집된 뼈를 보고서 약정 헌금을 하는 사람은 본인과 타인들의 연옥 생활이 1백9십만 2천 2백 2년 270일간 감해 진다고 하였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89.


나중에는 십자군의 원정을 위해 직접 이단자와 싸우는 데에 목숨을 바치거나 혹은 이 원정을 위해 헌금을 하는 자에게 면죄가 허용되었다. 면죄로부터 들어오는 돈으로 교회, 수도원, 병원 건축비, 대학의 재정, 등등으로 사용되었다.


2) 루터의 반박

1518년에 쓴 ‘95개조 논조 해설’에서 면죄증을 전적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36, 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75. p.11.
, 그 후 도미니칸파 수도원 부원장과 종교재판관을 지낸 실베스터(Sylvester Prierias, 1456-1523)가 열렬히 면죄증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루터는 면죄증이 로마의 아부자들의 협잡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협잡은 사람들로부터 돈과 신앙을 강탈한다고 비판하였다.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36, 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75. p.11.

루터는 ‘95개조 논조 해설’을 서점상들을 설복시켜 모두 불에 태우고 싶어했다.
루터는 “면죄부를 인하여 영혼이 연옥에서 해방된다는 교리는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1516년 설교를 통해서 세 번 이 면죄를 비판하였다. 자기 교구의 재정을 마련하는 세원을 방해하는 행위였지만 영적인 함정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롤란드 베인톤,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01. p.92.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알브레히트(Albrecht) 추기경은 면죄부 판매를 통해 총 39,245,120년에 달하는 연옥 형벌을 감면시켜 줄 수 있었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32.
심지어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를 위해 펑신도 공제 조합을 만들기도 하였다.
면죄부는 교황의 수입 원천이었다. 요하네스 테젤(Johannes Tetzel)의 판매 전략은 유명하다. 그는 “동전이 돈궤 속에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 오른다”라고 선전하였다.

루터가 공격한 것은 단순히 면죄부 판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맥그래스, A. E. ⌜종교개혁사상 입문⌟, 박종숙 옮김, 성광문화사, 2002. p.133.

이러한 관습 배후에 있는 사죄에 대한 잘못된 신학을 공격하였다. 사죄(赦罪)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문제이지 다른 어떤 사람이나 제도가 개입되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성서의 내용을 읽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교회의 참회형벌을 연옥의 형벌로 대치할 수 없다.(11)
(2) 연옥은 이성적으로도 성서를 통해서도 입증할 수 없다(18-19)
(3) 교황은 면죄부 설교나 연옥의 영혼들에게 형벌을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다(21-22, 52)
(4) 면죄부 판매는 인간의 가르침일 따름이다(27-28)
(5) 면죄부로써 자기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는 자는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32, 35)

(6) 자기 죄를 진실로 회개하는 자는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받는다(36,37)
(7) 참된 회개는 형벌을 갈망하고 사랑한다.(40)
(8)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궁핍한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낫다.(43, 45, 46)
(9) 베드로 대성당을 팔아서라도 면죄부를 팔아 갈취한 돈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50.51)
(10) 면죄부 때문에 말씀 선포를 침묵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다.(53)

(11) 죽은 자는 교회의 제반 법규들로부터 해방되었다.(13)
(12) 면죄부는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존엄성에 비하면 아주 보잘 것 없다.(68)
(13) 면죄부에 반대하는 자들은 비난 받고 저주 받을 것이나, 면죄부의 정당성을 설교하는 자들에 대하여 들고 일어나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71, 72)
(14) 교황의 면죄부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없앨 수 없다.(76)
(15) 교황은 교회를 짓기 위해 속 보이는 짓인 아무런 효험도 없는 돈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구해내려고 하는가?(82)

(16) 교황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잘못된 것이라면 기부금을 왜 돌려주지 않는가?(83)

(17)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설교 하는 자는 사라져라(92)
(18)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 없는 곳에 “십자가, 십자가”라고 설교 하는 자는 사라져라(93)

(19)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형벌과 죽음과 지옥에까지도 따라가려는 자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안정을 통해서 자신을 위안하려는 것보다 많은 고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을 격려해야 한다.(94, 95)



<아우구스부르크 신조>

아우구스부르그 신조의 내용

서문 (생략)

제1조 하나님에 관하여 ( Von Gott)

우리 교회는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이른바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과 세 위(位)에 관하여 니케야 회의에서 정한 신조는 참된 것이므로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즉 영원하시며, 형체가 없으시고, 분리되지 않으시고,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가지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자와 보존자이신 하나님의 유일한 신적 본질이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본질과 능력을 가지시고, 아울러 함께 영원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세 위가 있다. 이러한 조항에 반대하는 마니교, 발렌티누스파, 아리우스파, 유노미어스파 그리고 마호멧교도들을 정죄하여야 한다.


제2조 원죄에 관하여 (原罪, Von der Erbsunde)

우리 교회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 자연적인 방법으로 출생한 모든 인간은 다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죄가 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며 영원한 죽음을 가져오게 한다. 우리 교회는 펠라기우스파를 정죄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생래 (生來)의 악이 죄라는 것을 부인하며 자기의 힘과 이성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제3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Von dem Sohne Gottes)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은 축복받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으며 한 위격 안에 분리될 수 없는 두 본성인 신성 (神性)과 인성 (人性)을 가지고 계신다. 이 한 분 그리스도께서는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시다. 그는 성부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을 화해시키시고 원죄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실제적인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삼 일만에 확실히 부활하셨다. 그 후에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 영원히 통치하시고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을 보내어 악마와 죄의 힘에 대항하여 그들을 지키게 하셨다. 사도신조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제4조 의인에 관하여 (義認, Von der Rechtfertigung)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인간의 업적과 공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가능하고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서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5조 교직에 관하여 (Vom Predigtamt)

우리가 믿음을 얻기 위해서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행해야 하는 교직이 제정되었다. 그것은 성령께서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장소와 시간 가운데 임하시게 되며,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신앙을 일으켜 의로움을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재세례파 (Wiedertaufer)를 정죄하는데 이들은 성령이 외적인 말씀 없이 인간 자신의 준비와 공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6조 새로운 복종에 관하여 (Vom neuen Gehorsam)

이 믿음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善)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결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죄의 용서와 의인(義認)이 믿음에 의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부 중 암부로시우스는 "우리의 공적없이 믿음으로서만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라고 말한다.



제7조 교회에 관하여 (Von der Kirche)

유일하고 거룩한 교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고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 교회이다. 교회의 참된 통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족하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과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제8조 교회란 무엇인가? (Was die Kirche sei)

교회가 원래 성도들과 참된 신자들의 회중이기는 하지만 현세에 있어서 많은 위선자들과 악한 사람들이 신자들 가운데 섞여 있게 되므로 악한 사람이 집행하는 성례전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 2)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다. 성례전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진다 할지라도 효과는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의 가치에 따라서 효과 있게 될 수는 없다. 우리 교회는 도나투스(Donatus)파와 이런 유(類)의 사람들을 정죄한다. 이들은 교회에서 악한 사람들의 교직을 허용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악한 사람들의 교직은 무익하고 전혀 무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9조 세례에 관하여 (Von der Taufe)

세례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며,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아이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참여하게 된다. 우리 교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유아들은 세례 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을 배격한다.



제10조 성만찬에 관하여 (Vom heiligen Abendmahl)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참으로 임재하며 성만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분배된다고 가르친다. 아울러 우리 교회는 이와 달리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제11조 죄의 고백에 관하여 (Von der Beichte)

고백할 때에 모든 죄를 낱낱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개인적인 사면(赦免, absolutioprivata)은 교회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시편 19: 12)라고 시편에 기록되어 있듯이 모든 죄를 열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12조 회개에 관하여 (Von der Busse)

세례를 받은 후에 타락한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든지 그들이 회개할 때 죄의 용서가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와 같이 회개하는 사람에게 사면해야 한다. 회개는 원래 다음의 두 가지 부분으로 성립된다. 하나는 통회인데 죄를 알게 되어 양심에 찔림을 느끼는 공포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복음이나 죄의 용서에서 유래하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 것을 믿고 양심을 위로하며 공포로부터 양심을 해방시킨다. 이리하여 회개의 열매인 선행이 반드시 따라 오게 된다.

우리 교회는 한 번 의롭게 된 사람이 성령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재세례파를 배격하며, 아울러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생에서 죄를 범할 수 없을 만치 아주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배격한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후에 타락한 사람들이 비록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사면하지 않는다고 하는 노바티우스 (Novatiut)파도 정죄한다.



제13조 성례전 사용에 관하여 (Vom Gebrauch der Sakrament)

성례전은 사람들 가운데서 단순히 신앙고백의 표시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표시와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으며 또한 성례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일깨우고 굳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전을 통하여 주어지고 선언되는 약속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더해지도록 역시 성례전을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성례전이 그의 외적인 행위 (ex opere operato)로써 의롭게 한다고 가르치며 성례전을 사용할 때 죄의 용서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을 배격한다.



제14조 교회의 직제에 관하여 (Von Kirchenregiment)

우리교회는 누구나 정식으로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성례전을 집행하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제15조 교회의 규정들에 관하여 (Von Kirchenordnungen)

특별한 성일과 축일 같은 것은 죄와는 관계없이 지킬 수 있으며, 또한 교회내의 평화와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익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지키는 것이 마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처럼 여겨져 양심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달래며 그의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고 또한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제정된 인간의 전통은 모두 복음과 믿음의 교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역시 경고한다. 그러므로 은총을 자력(自力)으로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나,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제정된 식물이나 특정일 같은 것에 관한 서약과 전통은 무용하며 복음에 배치되는 것이다.



제16조 사법(司法)과 세속 직무에 관하여 (Von der Polizei und weltichem Regiment)

공민 생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정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업적이다. 크리스챤이 공직을 가지고 재판장이 되거나, 국법이나 다른 현행 법령에 따라 사건을 판결하고, 정당한 벌을 주고, 정당한 전쟁에 종군하고, 군인으로서 봉사하고 법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재판관이 요구할 때 서약하고 또한 자녀들을 혼인하게 하는 일 등을 모두 다 정당한 일이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챤에게 이러한 공직을 금하는 재세례파를 배격한다.



제17조 심판을 위해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Von der Wiederkunft Christizum Gericht)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에 심판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셔서 모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그는 경건하고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실 것이지만 불경건한 자들과 악마들에게는 끝없는 고통을 받도록 정죄하실 것이다.

우리 교회는 정죄 받은 자들과 악마에 주어지는 징벌에 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을 배격한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전에 경건한 자들이 세상나라를 점유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어디서나 억압당하리라고 하는 유대교적인 견해를 유포시키는 사람들도 역시 정죄한다.



제18조 자유의지에 관하여 (Von freien Willen)

인간의 의지는 사회 정의를 택하고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어느정도 가졌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성령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의(義), 곧 영적인 의를 행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을 때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은 이성의 판단 기능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이 세상에 관계된 일이지 하나님에 관계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펠라기우스파 및 그와 유사한 파들을 정죄한다. 그들은 성령 없이 자연적인 능력만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행위의 본질에 미칠 수 있는 정도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제19조 죄의 원인에 관하여 (Von Ursache der Sunde)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지만, 죄의 원인은 악한 자 곧 악마와 불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된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악인의 의지는 하나님을 배척한다.


제20조 믿음과 선행에 관하여 (Vom Glauben und guten Werken)

우리의 행위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거나 죄의 용서, 은총 및 의를 얻도록 하지 못한다. 이런 것은 홀로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기 위하여 중보자와 화해자가 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총 가운데 받아진다는 것을 믿을 때 그 믿음에 의해서만 얻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행위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된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공적과 은총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사들은 선행으로 은총을 얻는다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선(善)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다만 믿음뿐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이 믿음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새로워지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의향을 가지게 된다. 암부로시우스는 "믿음은 선한 의지와 바른 행위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한다.


제21조 성자 숭배에 관하여 (Vom Dienst Heiligen)

성자들의 유물은 우리가 각기 맡은 직책에 따라 그들의 믿음과 선행을 본받도록 우리 가운데 기념으로 둘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 앞에 중보자, 화해자, 대제사장 및 중재자로서 그리스도 한 분만을 두며, 성자에게 기도드리거나 성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기도드려야 한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제22조 성만찬의 두 형태에 관하여 (Von beider Gestalt des Sakrament)

성만찬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 두 가지를 다 평신도에게 주도록 되어 있다. 이런 관습을 따르는 것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26: 27)는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이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마셔야 할 잔에 대하여 분명히 명령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사제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라고 누구든지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 이하에서 모든 회중이 두 가지를 다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예를 들어주고 있다. 이 관습이 교회에서 오랜 동안 존속해 왔으나 어느 때에 또는 누구에 의하여 변화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제23조 사제의 결혼에 관하여 (Vom Ehestand der Priester)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사제들에 관하여 공통적인 불평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교황 피우스2세 (Pius Ⅱ, 1458-1464년)가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한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 보겠다. 그러나 플라티나 (Platina, 이탈리아의)는 이런 취지로 기록해 준다. 우리 사제들은 이러한 공공연한 추문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내를 얻었으며, 결혼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쳤다. 첫째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2절과 9절에서 말하기를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라"고 하며 또한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한다"고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독신 생활로 지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번성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창 1: 28). 더욱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역사 (役事)가 없이 인간의 힘으로 그 자신의 피조성 (被造性)을 변경시킬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적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혼을 해야 한다. 인간의 어떤 법이나 서약도 하나님의 계명과 제도를 무(無)로 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써 사제들은 아내를 얻는 것이 그들을 위하여 합당한 일이라 가르친다.

고대의 교회에서는 사제들이 결혼한 남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전서 3장 2절에서 말하기를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도며"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불과 400년전에서부터 비로서 사제는 독신 생활로 지내야 한다고 무리하게 강요받았다.


제24조 미사에 관하여 (Von der Messe)

우리들의 교회는 미사를 폐기했다고 그릇되게 비난을 받고 있다. 사실은 미사가 우리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으며 최고의 존경을 받으면서 거행되고 있다. 대부분의 관습적인 의식들도 보존되고 있으며, 다만 라틴어로 된 노래 부분들만이 여기 저기 독일어로 옮겨졌을 뿐이다. 그것은 민중을 가르치기 위하여 첨부한 것이다.

미사가 부끄러울 정도로 속화했고 또한 돈벌이를 위하여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 오랜 동안 선량한 사람들의 공공연하고 매우 슬픈 불평이 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런 악폐 (惡弊)가 모든 교회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고, 어떠한 사람들에 의하여 미사가 단순히 수입과 급료만을 위하여 거행되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법규에 어긋나게 미사를 행하는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만찬을 적합하지 않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엄히 경고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 11: 27)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제들이 이러한 죄에 대하여 경고했을 때 보통미사(missa privata, 사제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매일 행해지는 미사)는 어느 것이나 돈벌이를 위해서 밖에 거행되지 않음으로 우리 가운데서는 폐기되고 말았다.

제25조 죄의 고백에 관하여 (Von der Beichte)

우리들의 교회는 죄의 고백에 관하여 죄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고, 또한 모든 죄를 세심하게 열거하는 번뇌로써 양심을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모든 죄를 세밀히 서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세밀히 서술된 죄에는 아무 죄도 용서받지 못한다면 양심은 전혀 평화를 찾지 못할 것이다. 많은 죄들은 볼 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고대 저술가도 죄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다고 증언한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네 죄는 기도로써 참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라. 네 과오는 혀로 하지 말고, 네 양심의 기억으로 고백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 법규 주석서 난외의 주(註)에도 (참회에 관하여: De Poenitentia, Dist. V.chap. "Consideret")죄의 고백은 성서에 의하여 명령된 것이 아니고 교회에 의하여 제정된 인간의 권리에 속한 것으로 되어있다.


제26조 음식물의 구분에 과하여 (Von Unterschied der Speise)

음실물의 구별이나 그와 비슷한 전통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데 유익한 업적이고 또한 죄를 보상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종교제도와 새로운 축일과 새로운 금식이 제정되었고 교회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필요한 예배로서 이러한 행위를 엄격히 시행하였다.

여러 가지 전통에 대한 이런 견해로 인해 교회 안에 많은 해로운 일들이 생겨났다. 첫째는 은총의 교리와 믿음에 의에 관한 교리가 이것으로 불분명하게 되었다. 둘째로 이러한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을 흐리게 하였다. 왜냐 하면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훨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전통은 양심에 더 큰 휘험을가져왔다. 왜냐하면 모든 전통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의 준수가 필요한 예배 행위 가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사들은 우리가 인간의 전통의 준수로 인하여 은총을 얻거나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준수가 필요한 예배 행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 27조 수도사의 서약에 관하여 (Von Klostergelubden)

수도사의 서약에 대해서 말하자면 원래 어거스틴 당시 수도원은 자발적인 공동 집단체였다. 후세에 이르러 규율이 퇴폐 (頹廢)해 졌을 때 그 규율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서약이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수도원이 짜임새 있게 설계된 감옥처럼 되어 버렸다. 그 후 점차로 서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종교상의 의식들이 가하여 졌다. 이런 속박의 조건들이 교회의 법규에 반하여 많은 미성년자들에게도 굴레를 씌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불행과 부덕스러운 추문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날에는 수도원들이 성서 연구의 학원이었고 기타 유익한 학문의 전당이었다. 그리고 목사와 감독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배우기 위하여 수도원에 모여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도원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얻기 위하여 설정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우리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즉 독신생활을 하기에 합당치 못하는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것은 어떤 서약도 하나님의 명령과 제도를 무효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아내를 두고...." (고전 7: 2)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단순한 명령일 분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제도이다.

둘째로 청년 남녀들은 그들의 판단력이 성장하기 전에 이미 서약하도록 설득을 당하며, 때로는 강제로 행하도록 만들어졌다. 자발적으로 심사숙고하여 서약하는 것이 아닐진대, 그 서약의 의무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서약의 본질에 반대할 수 있는 권리는 만인에게 허락되어 있다.

교회의 많은 법규들은 15세 이전에 행한 서약을 무효로 돌리고 있다. 수년을 더 추가하여 18세 전에 행하는 서약을 금하고 있다. 대다수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본래 그들의 대부분은 적령기에 도달하기 전에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제28조 교권 (敎權)에 관하여 (Von der Bischofen Gewalt)

감독의 권한에 관하여 과에 큰 논쟁이 벌어졌었고 감독 가운데서 더러는 교회의 힘과 무력 (武力)을 부당하게 혼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혼동으로 인하여 큰 전쟁과 소동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 교황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이른바 열쇠의 힘에 의지하여 예배의 새로운 형태를 제정하고, 사면 선언의 보류와 포학 (暴虐)한 파문에 의하여 양심을 괴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왕국을 마음대로 이양하며 제왕의 주권을 탈취하려고까지 시도하였다. 오래 전부터 경건한 학자들에 의해 이런 비행들이 규탄 받아 왔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력과 세속정부의 권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권력은 복음을 증거하고 성례를 집행할 사명을 위임받고 있다. 교권이 다른 분야의 직무를 침범하거나, 이 세상 나라를 변혁시키거나 위정자의 법률을 폐지하거나, 합법저인 복종을 폐기시키거나, 어떤 행정 규정이나 제약에 관계된 판결에 대하여 간섭하거나, 어떤 형태의 국가가 세워져야 할 것이라는 점에 관한 법률을 위정자에게 지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 행정권은 교회의 통치권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슈말칼텐 신조와 일치 신조>

슈말칼텐 신조와 일치신조


1. 슈말칼덴 동맹 및 신조


16세기 종교개혁은 전통과 성경권위에 대한 싸움이다. 전통을 믿고 따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경을 믿고 따르는 개신교회와의 갈등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종교 회담을 통해서 간격이 좁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가톨릭과 비텐베르크의 개신교 사이의 골은 더욱더 넓어지고 깊어만 갔다.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했다. 이때 황제 칼 5세는 분명하게도 다수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편을 들었다.

황제는 루터교를 따르던 지지자들을 거부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변증적으로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고백서는 1531년 4월 까지 철회하도록 기간을 주었다. 또한 황제는 보름스 칙령이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며 모든 지역에서의 교회적 변화는 원상태로 돌려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교리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나 개신교의 책을 소유하기만 해도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안에 있던 독일은 제후들이 각각의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개신교의 신앙을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황제의 결정에 대해 루터는 크게 실망했다. 사실상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정부에 대한 폭력 저항을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농민 전쟁 때도 로마서 13장 말씀처럼 정부를 향한 순종이 성경적으로 명령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을 금하였다. 하지만 황제에 대해 실망한 루터는 이때부터 정부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저항의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이때 독일의 루터교 제후들이 힘을 얻었다. 그들은 황제에 맞서기 위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였다.

1531년 2월, 개신교 제후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독일 중부지역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모였다. 그들은 황제가 공격할 경우 6년 동안 서로 군사적 원조를 할 것을 약속하면서 직접적으로 황제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다. 이 연맹의 주도적 인물은 허센의 제후 필립 공작(Philipp, 1504-1567)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I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였다. 거기에 6명의 다른 제후들과 10명의 도시 대표들이 가세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에 참여한 도시는 안할트(Anhalt), 막데부르크 (Magdeburg), 브레멘(Bremen), 포메른(Pommern),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하노버(Hannover), 함부르크(Hamburg),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켐프텐(Kempten),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등이다.

황제의 친 가톨릭 정책은 결과적으로 루터 지지파들을 더욱 결속시켰던 것이다. 결국 슈말칼덴 동맹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1532년 7월, 뉘른베르크에서 터키의 침공에 대한 방어의 필요에 쫒긴 황제 칼 5세와 슈말칼덴 동맹은 임시협정을 체결한 후에 휴전에 들어갔다. 가톨릭 지역과 개신교 지역의 종교적 평화를 위한 협상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개신교 신앙고백을 따르는 영주들로 이루어진 슈말칼덴 동맹과의 관계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로 점철되어 갔다. 당시 이처럼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독일 동부 전 지역과 독일 북부 대부분이 루터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지역들에서 종교개혁이 진전됨에 따라 루터 교회의 영역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으로 더욱 확장되어 나갔다.



2. 슈말칼덴 신조

그 후 5년이 지났다. 황제 칼 5세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인 북 이탈리아 만투아(Mantua)에서 1537년 5월 23일 공의회를 개최했다. 복음주의 진영 곧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루터에게 만투아에서 열릴 총회에 제출할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루터는 여러 조언자들의 협력을 촉구한 뒤, 부탁 받은 대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을 작성했다. 루터는 슈말칼덴 동맹에게 신앙고백의 기반을 제시하고자 1536-1537년 사이에 개혁자들과 함께 슈말칼드 조항을 작성하였다. 이것이 슈말칼덴 신조(Schmalkald Articles)이다.

실제로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성경적인 기독교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특별히 개신교의 교리를 예리하게 정리했다. 주요 핵심 내용은 “이신득의, 죄, 율법, 회개, 복음, 세례, 연옥, 순례, 수도생활, 성인들에 대한 기도 단죄, 제단의 성례, 신앙고백, 파문, 서품과 소명, 사제들의 혼인, 교회, 수도 서약들, 인간 전승들, 미사의 정죄, 수도원 삶의 해로운 성격, 교황청, 교황주의자들의 거짓 회개,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행위 비판, 마귀” 등이다. 특히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이자 마귀의 사도로 낙인찍는다. 그는 과거의 신조들을 간략히 재 확증하면서 어떤 양보도 없었다. 루터는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에 이어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하였다.

루터가 이 문서에 서명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장 결석으로 인해 문서를 서명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537년 루터가 슈말칼덴에서 개신교 영주들과 더불어 공의회의 대표 파견 문제에 대해서 협의하고 있던 때에 심각한 결석증이 발작했다. 이 모임에서 루터는 신장 결석과 담석증으로 방석에 누워 중병환자로서 비텐베르크에 귀환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은 1537년 루터가 작성한 슈말칼덴 신조를 채택하지 않았지만, 슈말칼덴 신조는 종교개혁의 강령을 이루었다.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한 루터가 오늘날 교회에 주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신조와 교리의 중요성이다. 그동안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교회에 전해 내려온 기본적인 신앙, 즉 신조를 잘 정리해 주었다. 그는 개신교 신조에 대해서는 어떤 양보나 타협도 없었다. 신조에는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이 분명히 나타난다. 신조는 신약이 경고한 새로운 사상, 이단, 거짓교훈과 정통 기독교를 구분시켜 주는 신앙의 테두리이다. 즉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 신앙을 구별 짓는다.

신조는 비교적 짧게 요약된 기독교 교리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쉽고,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 준다. 루터의 공헌이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슈말칼덴 신조’이다. 루터 지지파들이 모여 결성한 동맹의 중심지가 되는 슈말칼덴에 있는 성 조지 교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설교했다.


3. 슈말칼덴 전쟁

로마 가톨릭과 루터지지자들로 조직된 슈말칼덴 동맹과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1531년에 시작된 슈말칼덴 동맹은 15년 동안 서로 연대하였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한 칼 5세는 독일의 종교개혁 세력을 억제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당시 권세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던 황제는 권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루터도 이것을 예측했다. 루터는 개신교 진영이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루터는 제후들에게 이제까지 성취한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황제는 1545년 12월 13일,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개신교 제후들은 당연히 참석을 거부했다. 이를 계기로 황제는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인 슈말칼덴 동맹에 대한 군사행동을 명한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는 가운데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스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5개월 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1546년 7월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동맹군은 군사적으로 황제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후들 간의 분열과 무능력으로 인해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Muhlberg)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은 패배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 비텐베르크에서 참수되었다. 루터의 도시는 개혁자가 죽은 후 15개월 만에 패배라는 수치를 당했다. 전쟁에서 패한 많은 도시들이 프로테스탄트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4.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

루터 지지파들로 구성된 ‘슈말칼덴 동맹’은 독일 내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과 황제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 상황이 빚어졌다. 마침내 황제도 이들의 단합된 힘에 손을 들고 말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1555년 9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종교평화회의 (Augsburger Religionsfriede)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황제와 루터 지지파 사이에 대화합이 이루어지면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개신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 (Augsburger Religionsfriede)이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칼 5세가 아니라, 그 동생 페르디난드 1세이다. 이 화의의 핵심은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는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이 아무런 간섭 없이 자기 영지 안에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루터교 프로테스탄트는 제국의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국가종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가톨릭과 루터 복음주의라는 두 신앙고백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은 끝났다. 독일은 신앙고백들의 시기로 들어갔다. 실로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못 박은 이후 38년 만에 이루어진 개신교 측의 승리인 것이다. 드디어 개신교회가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개신교의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아우그스부르크 구시가지 남쪽 끝의 울리히(Ulrich) 광장에는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를 기념하여 지은 울리히 아프라 교회가 있다. 작고 아담한 탑이 보이는 개신교회다.


5. 루터파의 신앙고백서 - “일치신조”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해 동안 루터의 제자들 간에 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루터교회는 루터교의 정체성을 찾고자 1580년에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작성하였는데, 루터교회의 기본 원리를 잘 보여준 신앙고백이다. 루터파를 이끄는 성직자와 군주, 귀족과 시의회가 일치신조서를 채택하였다. 루터교회의 모든 공식 교리문서들이 포함된 일치신조서는 전 세계 루터파의 신앙 고백적 표준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일치신조는 루터가 주장한 인간 의지의 노예상태 교리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재천명했으나, 그의 예정론은 누그려뜨렸다. 루터의 영향력은 루터파의 신앙고백서들을 종합해 놓은 일치신조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개신교의 정통 신학에서 각각의 신앙고백서는 상당 부분 루터에게 빚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렇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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